백제부흥운동 거점인 주류성 유적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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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 거점인 주류성 유적 확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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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우금산성서 동문지 발굴…백제 멸망 직후 복신이 거병한 주류성 비정

 

의자왕 20년(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멸망직후 부흥운동이 펼쳐진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병사를 거느리고,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부여풍(扶餘豊)을 맞아서 왕으로 세웠다.”

복신은 선왕인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북신은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당을 신라에 주기로 했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싸우다 죽자”는 내용의 격문을 내걸고 백제 유민들을 얻어 여러 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가 백제 부흥을 외치고 거병한 거점은 주류성. 현재 전북 부안 우금산성으로 비정된다.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석성(石城). 둘레는 3.9km이며, 우금바위에서 개암사 저수지 능선 밑까지 이어져 있다.

복신은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 가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사비성이 포위되자 당나라는 유인궤(劉仁軌)를 급히 파견해 구원했다. 복신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했다.

복신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 부흥군은 옹산성, 사정성, ·진현성 등을 공격해 탈환하고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해 내려 보내는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분이 일어났다. 복신은 함께 거병한 승려 도침을 죽이고, 임금으로 세운 부여풍까지 제거하려 했다. 왕족 출신인 복신 스스로 임금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선수를 쳐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다. 내분은 외적보다 더 무섭다. 결국 복신의 백제 부흥운동은 지도부 분열로 좌절되고 말았다.

 

▲ 발굴현장 모습 - 동문지와 등성시설 /문화재청 제공

 

복신이 백제부흥운동을 처음 펼친 주류성으로 알려진 우금산성(禹金山城)에 대한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이 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작업은 전북 부안군청과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진행하고 있다. 발굴현장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65-3번지.

지난해 11월에 시작돼 올해 3월에 마무리될 예정인 이번 발굴작업은 성 동쪽구간에 대한 성곽시설을 확인하기 작업이다. 지금까지 조사에서 ▲ 우금산성 동문지(東門址)와 등성시설(登城施設, 계단), ▲ 동문지와 인접한 성벽구조 등이 확인되었다.

동문지는 변산 정상과 이어지는 경사면에 있으며, 출입구 형태는 개방문(開拒式, 성벽이 좌우로 잘려 상부가 개방된 형태)으로 판단된다. 북쪽 측벽(側壁)석의 현재 상태로 파악했을 때 두 차례 이상 고쳐쌓은(修改築) 것으로 추정된다.

1차 문지의 규모는 길이 3.5m, 너비 3.9m이며, 수개축한 2차 문지는 길이 7.1m, 너비 3.3m로 1차 문지보다 너비가 줄었다. 1차 문지의 북쪽 측벽(側壁)과 성 외벽의 모서리, 2차 문지의 양쪽 측벽과 성 내‧외벽 모서리는 직각을 이루고 있다. 2차 문지 통로부 입구에서는 문확석(門確石, 문을 고정시키는 돌) 1매가 확인되었는데, 윗면에는 지름 24㎝, 깊이 8㎝ 크기의 원형홈이 있다.

특이한 점은 2차 문지 양쪽의 측벽에 너비 32~50㎝, 깊이 47~70㎝의 나무기둥(목주, 木柱)홈이 여섯 군데 시설되어 있으며 바닥에는 주초석(건축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더 이른 시기에 발견된 문지에서는 보통 땅을 파서 기둥홈을 마련하는데 우금산성은 목주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목주홈 간의 거리는 1.8m로 일정하며 양쪽 측벽석에 3개씩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문지 바닥면은 생토를 이용하여 흙다짐하였다.

등성시설은 동문지의 내부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확인된 길이는 4.2m, 너비 6.4m이며, 길게 깬 돌을 이용하여 계단 형태로 쌓았다.

동성벽은 바닥면을 잘 고른 뒤 모래흙과 풍화토를 깐 후 길게 깬 돌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불규칙한 돌을 사용해 줄 눈이 일정치 않게 쌓는 방식)로 축조하였다. 유물로는 다량의 어골문(魚骨文, 생선뼈무늬), 격자문(格子文, 문살무늬)이 새겨진 기와와 ‘부령(扶寧, 부안의 옛이름)’명 기와, 청자와 분청사기 조각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부안군은 이번 조사가 우금산성의 복원‧정비 사업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 동문지 조사현장(위) 및 측벽 축조 모습(아래) /문화재청 제공
▲ 우금산성 위치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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