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손병희 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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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손병희 선생 묘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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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3·1운동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실질적으로 운동을 이끌었던 손병희(孫秉熙) 선생 묘소가 있다.

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는 묘역은 화강암으로 된 석재 띠가 둘러져 있다. 중앙에는 천도교를 상징하는 표시가 새겨져 있으며 묘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묘역 오른편에 묘비, 왼편에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묘역 아래쪽에 있는 봉황각은 1912년 손병희가 지은 누각으로 의창수도원이라고도 하는데,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교육한 수련장이었다. 손병희는 이곳에서 1919년의 3·1운동을 구상하였다 한다.

 

▲ 손병희 선생 묘소 /문화재청

 

손병희(1861. 4. 8~1922. 5. 19) 선생은 충북 청원에서 출생해 1882년 동학에 입문했다.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수양을 닦았으며, 입교 10년만인 1894년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게 된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과 남접군과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높아갔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선생은 원산, 강계 등지로 몸을 피하다가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제3세 교조로 취임해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가 러일 전쟁 전후로 이용구등이 일진회를 만들어 일제의 앞잡이가 되는 것을 보다못해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귀국한다.

1919년 선생은 고종황제 장례일(3월 3일)을 이틀 앞두고 천도교 15명, 기독교 18명, 불교 2명의 33인 민족대표들의 서명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완성하고 독립을 선언하려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33인중 29인이 참석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후 일경에 자진 체포되었다. 이 선언식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선생은 1920년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순국해 이 곳에 안장되었다. 향년 62세였다.

 

▲ 손병희 선생 묘소 /문화재청
▲ 묘약 주변/사진=김인영
▲ 묘역 해설판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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