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③ 민속촌으로도 불렸던 대치동 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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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③ 민속촌으로도 불렸던 대치동 구마을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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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강남에 민속촌이라 불린 마을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인 19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선배들이 그렇게 부른 걸 저희도 따라 불렀을 테니 아마도 그 마을은 1970년대에도 민속촌으로 불렸을 겁니다. 

그곳이 민속촌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주변 동네와 달리 아직 전통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대치동 언덕 위에 자리한 제 모교에서 그 동네를 내려다보면 한옥 기와지붕들을 볼 수 있었고, 그 너머로는 은마아파트가 보였지요. 그러니까 대치동에 아직 개발 안 된 전통 마을이 있었던 거죠.

대치동을 기록한 과거의 자료는 많이 없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의 대치동 인근인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지점을 학탄(鶴灘)으로 기록했지만, ‘대치’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의 거의 모든 고을을 간선도로와 함께 표시한 지도입니다. 그런데 지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치는 지도에 기록할만한 길이 없는 외진 곳이었나 봅니다.

대치(大峙)는 우리말로 큰 언덕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은마아파트 사거리에서 삼성로를 따라 포스코 사거리로 넘어가는 곳이 그 큰 언덕이지요. 

구마을은 대치동 큰 언덕 한편에 자리했습니다. 대치동 일대는 한강 지류인 탄천과 양재천이 합류하는 저지대라 한강의 수위가 올라가면 범람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언덕에 마을이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치동, 한때 서울 근교농업의 중심

대치동은 근대에 접어들며 서울의 근교농업을 담당했습니다. 대치동뿐 아니라 강남 일대가 그랬지요. 1938년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광주군 언주면(현재의 강남구)과 시흥군 신동면(현재의 서초구)은 경성에 소채(蔬菜)를 공급하는 주요한 공급처”라고 소개합니다. 

해방 후 서울에 인구 유입이 늘자 강남의 농경지는 서울 도심에 채소류를 공급하는 근교농업이 더욱 활발해집니다. 수해가 잦아 자급자족에 급급했던 대치동 일대도 해방 후부터 근교농업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신문 기사가 있습니다. 1964년 <동아일보>의 한 기사는 한강 건너 서울 근교와 연결하는 뚝섬 나루터를 소개합니다. 한강에 교량이라곤 한강철교와 인도교, 그리고 천호대교만 있던 시절이지요. 그래서 1963년 1월에 서울로 편입된 강남 지역으로 가려면 한남동이나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는 게 가장 빨랐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봉은사 나들이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뚝섬에서 청담동 간 노선을 소개하는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청담동 백사장’에 있었던 나루터가 청담동과 삼성동, 그리고 대치동 등의 농산물을 서울 도심으로 나르는 일종의 물류 기지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참고로, 수인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의 이름이 ‘청수나루역’이 될뻔한 적 있습니다. 과거 청담동에 있었던 ‘청숫골 나루터’에서 유래한 역명이었지요.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해 지금의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2017년경 대치동 구마을의 모습. 대치동 큰 언덕, 휘문고등학교가 자리한 곳에서 바라본 구도이다. 은마아파트가 멀리 보인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대치동은 외진 곳이었습니다. 청담동의 나루터로 가려면 우선 대치동의 큰 고개를 넘어야 하고, 삼성동 봉은사 근처에서 청담동 방향으로 또 고개를 넘어야 했지요. 만약 트럭 대신 농산물을 실은 우마차로 간다면 멀고 험한 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대치동 인근 탄천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네요. 대치동 구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지금의 탄천2교 부근에 뚝섬으로 연결되는 나루터가 한동안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 기사를 참고하면 청담동 나루터는 영동대교가 건설된 1973년 11월까지 운행했습니다. 하지만 탄천 나루터에 대한 기록은 다른 데서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근교농업으로 바빴던 대치동의 일화를 보여주는 기사도 있습니다. 1972년 <경향신문>의 한 기사는 대치동 주민이 자기 집에 탁아소를 연 것을 소개합니다. 농번기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서 사비를 들였고, 4H 클럽 회원들의 협조를 받아서 30명의 아기를 돌본다는 취지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서 ‘농번기’와 ‘4H 클럽’이라는 단어가 당시 대치동의 분위기를 엿보게 합니다. 두 단어 모두 농촌과 관련 깊습니다. 

4H 클럽은 ‘낙후된 농촌의 생활 향상과 기술 개량을 도모하고 청소년들을 고무하기 위해 시작된 국제적 운동 단체’입니다. 그러니까 1972년까지만 해도 농촌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4H 클럽이 대치동에 있었던 거죠. 서울시에서 대치동 구마을을 조사한 자료집을 보면 대치동의 4H 클럽(대치 4H 구락부라고 쓰인) 표지석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나온 탁아소의 지번을 지금의 주소로 바꿔보니 대치동 구마을이라는 지명과 함께 휘문고등학교와 은마아파트 사이에 자리한 지역이 지도에 뜹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민속촌으로 불렀던 곳이 언제부터인가 대치동 구마을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시 자료집에도 이곳을 구마을이라 지칭하지만 왜 구마을로 불리는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주변에 새로 개발된 마을과 구분하면서 부르던 게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시 자료를 보면 1950년대에 구마을은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60년대 들면서 일부 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다른 일부는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반 대치동 구마을에는 여전히 전통가옥이 많았지만,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대치동 구마을에는 2~3층 규모의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이 들어서며 전통가옥을 대신하게 됩니다. 대치동 구마을은 은마아파트 같은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건설하기에는 공간이 좁은 데다 평지가 아닌 구릉지였습니다. 그래서 연립주택이 대거 들어선 것으로 보이네요. 

2022년 대치동 일대 항공사진. 대치동 구마을은 재개발이 진행 중인데 인근 지역과 비교해도 주택과 도로 구획이 반듯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노란 원은 대치동 은행나무. 사진=서울시항공사진서비스. 국토지리정보원

주택과 도로 구획이 반듯하지 않은 까닭

항공사진으로 보면 대치동 구마을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예전 전통 가옥들이 있던 자리, 그러니까 옛 골목 구획 그대로 건축물이 들어선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마을 안에 있던 농지가 택지로 되면서 연립주택이 들어서게 되지요. 이런 경향이 1980년대 중반부터 가속화되더니 1990년 들어서는 아예 빈 땅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 항공사진을 확대해 구마을의 주택과 도로의 구획을 살펴보면 반듯하지 않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주변 지형지물에 따라 집과 도로가 들어선 까닭인데요. 강남의 다른 지역이 반듯한 모양으로 개발되었다면 대치동 구마을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굴곡진 모습, 산자락 따라 혹은 농경지 따라 들어섰던 옛 마을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개발된 거죠.

그런 구마을도 점차 옛 구획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모습입니다. 지금 대치동 구마을은 재개발이 한창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대치동 구마을에서 가장 넓어 신작로로 불렸던 길이 대치동 구마을 재개발 1지구에 포함되면서 사라지고, 옛날 길 위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예전 신작로는 대치동 구마을 남쪽 입구의 ‘도곡로 87길’이라는 좁고 짧은 길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과 재개발 공사장이 만나는 코너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은행나무만이 많은 것이 사라져가는 대치동 구마을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022년 10월 즈음의 대치동 은행나무. 수령 530년의 서울시 보호수. 대치동 구마을 입구, 재개발 현장 입구에 있다. 사진=강대호

개발이 한창인 구마을에서 이 은행나무가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철제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재개발 현장과 붙어 있어서 조금은 숨 막혀 보이기는 합니다. 

수령이 약 530년인 대치동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을 겪어온 만큼 전설이 깃들어 있지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한 스님, 혹은 어느 할머니가 은행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거기서 움과 싹이 돋아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이야기입니다.

530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를 대치동 구마을 사람들은 영험하게 여겨 매년 제사를 지내왔고, 기념할만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앞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구마을 사람 중 많은 이가 사망하거나 재개발로 마을을 떠났지만, 지금도 매년 음력 7월이면 은행나무 앞에서 옛 주민들이 모여 마을 제사를 지낸다고 하네요. 

올 음력 7월이 기다려집니다. 대치동 은행나무 앞에서 열리는, 대치동 구마을 사람들이 주관하는 마을 제사가 궁금했거든요. 어쩌면 제가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지 벌써 기대가 되네요.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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