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 이야기]① 논현동 자작나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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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 이야기]① 논현동 자작나무를 아시나요?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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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서울 강북에서 태어나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강남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았던 동네들 모두 지금은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쉽기도 하고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그 동네들의 변화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칭 도시탐험가가 되었습니다. 서울 곳곳을 탐험하듯 살펴보고, 언론 기사와 도서, 연구 문헌과 각종 사진 자료 등을 발굴하듯 파고들며 서울의 변화와 숨겨진 이야기를 찾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 강남의 논현동에 멋들어진 자작나무가 있었습니다. 소원을 빌면 노총각이나 노처녀에게는 짝이 나타나고 홀아비나 과부에게는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는 성사목(成事木)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혹시 이런 나무의 존재를 들어본 적 있나요? 아마도 없을 겁니다. 논현동 어느 언덕배기에서 600년 넘게 자리했었다는 이 자작나무를 지금은 찾을 길이 없으니까요. 

제가 논현동 자작나무를 알게 된 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입니다. 이 드라마에는 어느 마을을 지켜온 수백 살 먹은 팽나무가 등장하는데요, 배경으로 나온 팽나무가 실제로 있는 경남의 한 마을이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멋지게 흐드러진 팽나무이지요.

'우영우 팽나무'가 소환한 강남의 '성사목'

저는 ‘우영우 팽나무’를 보면서 1970년대 강남 곳곳에도 멋진 나무들이 있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수백 년 넘게 살아 신성시되던 고목들은 아직 아파트로 개발되지 않은 전통 마을들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지요. 혹시 그 나무들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 봤습니다. 그러다 논현동 자작나무를 소개한 오래전 신문 기사 두 편이 눈에 띄었지요.

그중 1972년 8월 중앙일보 기사는 자작나무에 담긴 전설을 소개해 흥미로웠습니다. 논현동 자작나무가 예로부터 성사목으로 유명했다고요. 하지만 1970년대 초반 강남 개발로 인해 논현동이 변해가는 모습도 담고 있었습니다. 논현동 언덕의 울창했던 나무들이 뽑혀가면서 자작나무만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고요.

1973년 4월 경향신문에는 논현동 자작나무의 사진이 나와 이채로웠습니다. ‘보호수로 지정된 논현동 언덕에 있는 자작나무’라고 사진 제목을 달았고, “수령 6백년, 높이 18m, Y자 모양으로 생겨 성사목(性思木)으로 이름난 거목, 과부를 재가시킨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작은 사진과 사진에 달린 설명만 있는 기사였지요.

혹시 논현동 자작나무를 다룬 신문 기사나 문헌이 더 있을까 찾아봤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편의 기사 외에는 없었습니다. 논현동 자작나무는 홀연히 사라진 듯 보였지요.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났나 봅니다. 전설을 간직한 범상치 않은 모습의 고목이라 존재감을 자랑했을 텐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든 거죠.

1973년 4월 5일 경향신문. 식목일 풍경을 다룬 기사. 왼쪽 작은 사진이 ‘논현동 자작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서울 성동구 논현동 76 언덕에 있는 자작나무’라고 사진 제목을 달았고, “수령 6백년, 높이 18m, Y자 모양으로 생겨 성사목(性思木)으로 이름난 거목, 과부를 재가시킨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고 사진 설명을 달았다. (출처: 경향신문.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저는 ‘논현동 자작나무’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논현동에 사는 지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1970년대나 80년대부터 논현동에서 살고 있지만 ‘논현동 자작나무’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논현동이 개발되기 전부터 살아온 주민을 찾으면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논현동 자작나무’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돌아다녀 봤습니다. 

1972년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논현동 자작나무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3 한강을 건너 경부고속도로 쪽으로 3백m쯤 가다가 영동 지구 개발 계획으로 생긴 뚝섬으로 통하는 신작로를 따라 5백m쯤 되는 곳에 버티고 서 있다”고 위치를 설명합니다. ‘제3 한강’은 지금의 한남대교를, ‘뚝섬으로 통하는 신작로’는 지금의 도산대로를 일컫는 듯합니다.

이 기사에는 논현동 자작나무가 자리한 주소, 구 지번도 나옵니다. 다만 강남이 개발되기 전, 그러니까 토지구획 정리 전 지번인데다 세부 번지로 분할되기 전이라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이를 지금의 지번으로 따져보면 대략의 위치만 추정할 수 있지요. 아무튼 위치 설명과 옛 지번으로 미루어보면 자작나무는 논현동 언덕 어디엔가 있었던 건 확실한 듯합니다.

논현동 언덕은 주택가가 되었습니다. 자작나무의 흔적은 물론 선주민을 찾기도 어려웠지요. 학동공원에 산책 나오신 어르신들께 여쭈어도 그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사신 분이 1980년대에 이사하셨더라고요. 어르신들은 주택가로 변한 논현동만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일까 논현동 자작나무를 여쭤보니 낯설어들 하셨지요.

혹시나 하고 강남구청 ‘보호수’ 담당 부서에 문의했지만, 관련 기록이 없어 ‘논현동 자작나무’가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다만, 보호수는 죽은 후 보호수 지정에서 해제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논현동 자작나무가 보호수 지정에서 해제되자 땅 주인이 뽑아버린 건 아닐까 하고 유추해 봤습니다.

논현동 자작나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요? 1973년 경향신문에 실린 사진 설명에 따르면, 논현동 자작나무는 ‘높이 18m에 Y자 모양’으로 뻗은 가지들을 뽐냈다고 합니다. 기사 속 사진을 토대로 그 자태를 상상해 봤습니다. 비교할 다른 사진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논현동 자작나무는 오래전 기사 속 작고 흐릿한 사진, 그 한 장으로만 남은 것일까요?

불현듯, 항공사진으로 자작나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키가 크거니와 너비도 남자 어른 네 명이 팔을 두른 것과 맞먹는다고 했으니까요. 서울시에서는 1972년부터 지금까지 매해 서울시 전역을 촬영한 항공사진을 축적해두고 있으니까 혹시나 하고 검색해 봤습니다. 

항공사진에 남은 자작나무와 강남 변천사

논현동 자작나무가 자리했던 곳의 주소로 검색하니 1972년 논현동 일대가 나타났습니다. 너무 어두워 1973년 항공사진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사진을 확대해 보자 커다란 나무의 음영이 드러났습니다. 1974년 항공사진에서는 경향신문에 실린 자작나무 사진과 똑 닮은, 굵은 밑동에 가지들이 Y자로 뻗어나간 나무가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1977년까지 매해 논현동 자작나무를 항공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8년부터는 항공사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논현동 자작나무는 1977년과 1978년 사이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뽑힌 걸로 추정할 수 있었지요. 

사진 왼쪽은 1977년 논현동 일대 항공사진 부분 확대. 노란 원이 논현동 자작나무. 자작나무 주변에 농가가 헐리고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선 모습이다. 오른쪽은 1978년 논현동 일대. 노란 원이 논현동 자작나무가 있던 자리로 사라진 모습이다. 사진 하단 도로는 지금의 학동로다. (사진: 서울시항공사진서비스. 국토지리정보원)

항공사진들은 논현동 자작나무의 운명뿐 아니라 논현동 일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자작나무 근처에 집들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자작나무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주택가가 되어가는 모습이었지요. 사진 범위를 넓혀보면 논현동 일대는 물론 강남대로 동쪽과 서쪽 양측으로 개발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가을 저는 논현동 자작나무를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제게 오래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무의 존재가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 민초들의 삶을 목격한 고목이, ‘보호수’였는데도 기록조차 없이 사라진 아쉬움, 혹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물론 논현동 자작나무가 쭉 보호수로 관리받았다 하더라도 고급 주택가로 개발되던 강남의 논현동에서 입지가 불안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글을 써서 논현동 자작나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에 사라진 나무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요. 

그래도 혹시나, 논현동 자작나무를 기억하는 이가 어딘가에 있다면, 그래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잠시나마 자작나무가 있던 그 시절의 논현동 언덕배기를 소환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들의 기억이 모이게 된다면 논현동 자작나무가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아나지 않을까요. <매주 일요일 연재>

2022년 가을, 오래전 자작나무가 있던 논현동 어느 주택가. 고급 빌라와 단독주택이 들어선 곳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 최근 성탄절 특별사면을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집이 있다.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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