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남아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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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남아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흔적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2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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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천궁에서 시해…장충단공원에선 해마다 추모제 열려

 

일본이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배력이 커지는 못마땅하게 생각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동원해 일본을 견제하게 되니 이른바 ‘3국간섭’이다. 일본은 전쟁의 대가로 어렵게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게 되었다. 이에 발 빠른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일본군에 의하여 훈련시킨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했다. 일본으로 볼 때는 다 된 밥에 콧물 떨어뜨리는 셈이었다.

▲ 미우라 고로 /한선생 제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끈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조종 하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불리한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조폭 수준으로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하수인으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의 사장 아다치(安達)와 낭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았다. 일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여 작전을 개시하였으니 이른바 ‘여우사냥’이다.

또 명성황후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을 참여시킨다. 대원군은 당시 지금의 마포 동도공고자리에 있었던 아소정(我笑亭)에 있었는데, 일본은 그를 끌어들여 사건이 탄로날 경우 그를 배후조정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 경복궁 건천궁 /문화재청 경복궁

 

1895년 음력 8월 20일, 양력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이다. 역사가들은 그날의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국모가 침략자의 창검에 참혹하게 살해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태워진 국치일이다.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이 곳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곳이다. 그 시각 명성황후는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새벽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와 일본의 낭인무리들은 서대문에서 조선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에 이르렀다.

훈련대 연대장으로 1중대 병력으로 왕궁호위를 맡았던 홍계훈을 칼로 쳐 죽이고 군부대신 안경수마저 죽이고 경복궁에 난입했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도 일본의 칼에 죽으니 세자(후에 순종), 힘없는 궁녀, 명성황후만 있을 뿐이었다. 세자를 밀쳐내고 명성황후를 찾아 수차례 칼로 난자했다. 그들은 시체를 녹산에서 태우고 경회루에 재를 뿌렸다.

 

▲ 명성황후 /한선생 제공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등장인물이 여럿이다.

홍계훈은 사실 영화와 뮤지컬 드라마에서 명성황후의 호위무사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다. 그는 동학농민 항쟁을 진압한 공을 세웠지만 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관군의 힘으로 진압할 수 없다 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청군을 끌어들여 청일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어쨌든 이 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훈련대 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오군란때 군인들이 궁궐에 난입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할 때도 지켜 궁궐 밖으로 피신토록한 사람이다.

시위대장 홍계훈이 일본 낭인들에 맞서 명성황후를 막기 위해 몸을 던져 헌신했다면, 일본의 편에서 함께 궁궐에 난입한 훈련대 대대장이 있었다. 우범선이다. 씨없는 수박을 만든 존경받은 종묘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다.

 

이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외국인이 있었다. 퇴역 미국장교 다이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다. 사바틴은 독립문, 러시아공사관, 경운궁의 정관헌, 제물포의 여러 양관을 설계한 근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들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사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였던 일본인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났다.

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이자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사변이었지만, 일본은 유야무야로 결론짓고 말았다.

 

▲ 히젠도 /한선생 제공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絶命)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칼 히젠도(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쿠시다 신사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새겨져 있다. 히젠도는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칼로 전쟁용 무기가 아닌 애초에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120㎝, 칼날 90㎝의 칼이다.

이 칼을 누가 이곳에 두었을까? 1908년 토오 가츠아키(藤勝顯)가 신사에 기증했는데 그는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침입한 세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사건 이후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사찰에 이 칼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 살기가 너무 짙은 칼을 절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신사에 보관시킨 것이다.

 

▲ 서울 중구 장충단비 /사진=김인영

 

을미사변 이후 1900년 고종은 남산 북쪽 기슭에 이일로 인해 죽은 분들을 위한 사당을 짓고 봄 여름으로 제사를 지내니 장충단(奬忠壇)이다. 장충단은 지금의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일제는 이곳을 훼파(毁破)하여 공원을 만드니 장충단 공원이 되고 이또 안중근의사에게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을 짓는다. 그의 한자 이름 伊藤博文에서 박문(博文)을 붙인 이름인 박문사(博文社)다. 이 박문사를 지을 때 경희궁의 흥화문을 떼어다 붙이니, 몸바쳐 나라를 지킨 지하의 영혼들이 통탄할 일이다.

해마다 10월 8일이되면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장충단에서 을미사변 때 순사한 열사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장충단추모제」가 열린다. 을미사변때 순국자인 홍계훈, 이경직 등을 추모하는 행사다.

6·25 때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됐으나, 비는 남았다. 비 앞면의 장충단이라는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이 비는 지금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비는 지금 신라호텔 자리인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 서편으로 옮겼다.

122년전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건이 이 땅, 그것도 왕궁의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세자비 순명황후는 충격으로 죽었다. 이땅에 사는 후손들은 그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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