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불법조업 중국 황당선 강력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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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불법조업 중국 황당선 강력단속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2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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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군사와 무기로 격퇴” 지시…해경, 실탄 사격으로 격퇴

 

불법 조업을 하기 위해 서해에 몰려온 중국 어선 40여척에 대해 우리 해양경찰이 200여발의 실탄을 쏘아 쫓아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19일 오전 9시께 중국어선 40여척이 전남 신안군 가거도 서쪽 해상 48해리(89km)의 우리 해역에 침범해와 대한민국 해경 경비함정이 퇴거를 요구하는 경고방송을 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실탄 사격을 했다고 한다. 해경은 경비함정 4척을 동원해 K2 소종 21발, M60 기관총 180발을 발사했다. 중국 어선들은 5시간만에 우리해역에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뉴스를 보면서 조선시대에도 출몰한 중국의 불법어선에 대해 영조임금이 대처한 방식이 떠오른다.

 

▲ /해양경찰청 홈페이지

 

영조 30년 (1754년), 임금이 몸소 황당선에 적극 대처하지 못한 황해도 수군책임자 신사언을 심문했다. 조선시대 황당선(荒唐船)이란 조선 해역에서 불법어로를 자행하던 중국배를 말한다. 거칠황(荒), 당나라당(唐)을 써 ‘거친 중국배’라는 뜻이다

앞서 황당선이 백령도에 정박해 중국인 18명이 뭍에 내렸다. 수사 신사언이 이들을 잡아 육로를 통해 중국에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중국인들이 크게 두려워해 서로 연락을 취했다. 인근 해역에 있던 10척의 중국배(唐船)가 떼를 지어 몰려 왔는데, 그 수가 500~6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백령도를 포위하고 체포된 18명을 내어 달라고 했다. 이에 첨사 이백령이 7명을 보내자, 중국인들이 나머지 11명을 빼앗고, 조선의 장교 한사람도 잡아 갔다.

이에 영조 임금이 진노했다.

“중국배(胡船)가 많기는 하지만 짧은 병기(兵器)조차 없고, 백령진이 약하기는 하지만 군사와 무기(器械)가 있다. 중국인들을 뜻대로 죽일수는 없더라도 어찌 막을수 없겠는가. 수사도 군사를 징발하여 쫓아가 그 잃은 것을 빼앗아 와야 했다. 하물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서 임금에게 보고해 물어보려 하다니(狀聞) 매우 놀랍다. 당장 가서 신사언을 잡아오라.”

임금은 신사언을 직접 불러 심문하고, 양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회(灰)를 칠해 병졸들에게 돌리고 곤장과 백의종군의 벌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도 중국배의 불법어로로 곤욕을 치렀다. 영조실록의 기록에서처럼 중국의 불법선박은 수백명이 떼를 지어 서해바다를 헤집고 다녔다.

조선왕조실록에 황당선에 대한 기록이 80여회 나온다. 중종 35년(1540년) 1월에 “황해도 풍천부(豊川府) 침방포(沈方浦)에 황당선 1척이 바람이 심해 배를 운행할 수 없게 되자 강가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붙잡아 조사하니 4명의 의복 중에는 중국 것도 섞여 있어 중국인인 듯했으며 말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게 첫 기록이다. 표류한 중국선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종 20년(1883년)에 나타난다. 조선 왕조가 내내 황당선에 시달린 것이다.

황당선은 근해에 나타난 정체 모를 외국선을 의미하지만, 주로 중국 배를 일컬었다. 특히 중종~명종조인 1540~1560년 사이에 황당선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불법조업선에 해당한다. 이 불법선박들이 우리 해역에 나타나 조선 백성들을 괴롭혔다. 수군이 나포해 조사해보니, 왜인(倭人)도 있었고, 중국인도 있었다. 왜인인줄 알고 죽였는데 중국인이었다는 기사도 있다. 황당선 가운데 중국 남부와 류큐(오키나와), 일본 사이를 왕래하며 왜구들과 함께 밀무역을 하던 선박들도 있었다. 대형선에는 100명 이상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으니, 이 당시 밀무역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수 있다.

처음에는 조선정부도 온건하게 대했다. 상국인 명나라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중국 배를 만나서 ‘너희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워 잡은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구제하려는 것이니, 투항하면 너희가 바라는 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분명히 설명하고, 투항하지 않거든 병조의 행이(行移, 전투수칙)에 따라 싸우도록 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중종이 황당선과 싸우지말라고 한 것은 “중국으로 보내면 저들은 반드시 항거하여 싸운 사실을 숨기고 혹 우리 나라가 살상하였다고 말할는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실록은 썼다.

하지만 황당선의 폐악은 심해져 갔다. 매년 해변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갔다가 버려두기도 했으며, 조선 수군이 다가가면 화포를 쏘며 항거하여 싸우고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체도 황당선은 끊이지 않았다. 숙종 때에는 청국에 보내는 사신을 통해 황당선의 출몰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을 타고 노략질을 감행했다. 가뭄이 극심한 해엔 황당선의 출몰도 빈번했다. 해삼과 전복을 채취하거나 시골 여인을 납치해가기도 했다.

주로 출몰하는 곳은 서해 도서지역이었다. 제주와 남해안, 심지어 울진 등 동해안에도 출몰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정부는 황당선을 나포해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지방관리나 백성들이 황당선이 나타나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라우수사 민응서는 나주의 섬에서 황당선과 접전할 때 기회를 보아 적에게 대응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겁이 나서 배안에 엎드려 허둥지둥 체통을 잃어 사람이 많이 죽고 다쳤으며, 싸움에 져서 달아나매…” (중종 39년, 1544년)

“황당선이란 중국 배인지, 일본 배인지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인데, 백성과 관리들이 거의 다 도망쳤다고 합니다. 만일 적이 처들어와 점거한다면 이는 한 고을을 내주는 것입니다.” (명종 1년, 1546년)

조선 정부가 겁에 질려 도망가는 관리와 백성들에 죄를 묻자 아예 황당선 출몰 사실을 보고조차 하지 않는 관리도 생겨났다. 숙종 8년(1682년)에 황당선 9척이 초도에 와서 정박하고 며칠간 머물렀는데 첨사 장후량이 보고하지 않았다. 임금은 장후량을 잡아 심문한후 그의 목을 베도록 명했다. 조선 정부는 황당선의 폐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숙종 이후 황당선을 나포하고, 하선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 지난 9월 5일 오전 인천시 서구 경인아라뱃길 인천터미널에서 해양경찰청 불법외국어선 단속역량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해양경찰청 자료사진

 

우리 해역에서 중국의 불법어로가 갈수록 흉포화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10월에는 단속에 나선 해양경찰 경비정을 들이받아 침몰시키고 도주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주로 꽃게철 대거 출몰하는 불법 중국어선은 선체에 쇠창살을 꽂고 조업하거나 해경대원들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등 저항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단속을 방해하기 위해 어선 여러 척이 무리를 이뤄 조업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서해 상에 출몰한 중국어선들은 해경이 나타나면 SSB(무선통신)와 VHF(초단파) 등의 장비를 써서 무전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이들은 배를 정박할 때 쓰는 전용 홋줄로 어선 여러 척을 한꺼번에 묶는 '연환계'도 쓴다. 해경 대원이 중국어선에 오르면 다른 어선으로 뛰어넘은 뒤 홋줄을 끊고 달아나기 위해서다.

중국 어선의 폭력에 우리 해경이 강력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해경은 장비와 인력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 영조 임금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벙력이 없는 것도, 무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우물쭈물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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