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한이 어려있는 덕수궁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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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한이 어려있는 덕수궁 중화전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12.0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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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내외 압박으로 황제 양위식이 열린 곳

 

한해가 저물어간다. 달력 한 장을 남긴 올해는 고종황제가 19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지 120주년 되는 해다.

고종 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궁궐은 역시 덕수궁이다.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던 곳인데,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고 했다. 그 후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머물면서 궁의 이름(궁호)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 중화전 /한선생 제공

 

덕수궁 안에도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많은 역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중화전(中和殿)이다. 중화전은 대한제국 법궁인 경운궁의 정전(正殿)이었다.

정전이 무엇일까? 먼저 궁궐의 구조부터 알아보자. 궁궐은 3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있다.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

외조(外朝)는 궐내각사등 궁궐에 있는 오피스 영역이다. 궁궐은 왕만 사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왕의 업무를 도와 국가행정을 맡아서 하는 각사가 있다. 외조를 지나면 공식적인 업무공간, 업무를 처리하는 영역인데 국가의 공식 행사장이라 할 수 있는 정전(正殿)과 왕의 집무실 성격의 편전便殿인 치조(治朝)가 있다. 그 뒤에는 왕이 주무시는 침전을 포함해서 쉬면서 국가경영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사적인영역인 연조(燕朝)로 나누인다.

 

▲ 고종 황제 어진 /한선생 제공

중화문을 들어서는 순간 치조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중화문을 들어가면 왕이 밟고 들어선다는 답도(踏道)가 다른 궁궐과는 사뭇 다르다. 문양이 봉황이 아니라 용이다. 봉황(鳳凰)은 전설속의 새로서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을 말한다. 우리가 쓰는 속된 말 중에는 일이 잘 안된 경우에 “황되었다”. “황이다”라는 표현을 있는데 이것은 수컷이 아닌 암컷을 낮추어 부르는 남존여비의 사상에서 유래된 말이다.

각설하고, 중화전은 황제의 궁이므로 가장 높은 위계의 동물인 용을 답도에 새겨 넣은 것이다. 가만히 보면 중화전의 전각도 황색으로 칠해져있다. 황제의 궁이므로 적색이 아니라 황색, 즉 노란색이다.

게다가 월대(月臺) 위의 돌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왕에게는 일천(千)자를써서 천세(千歲)라하고 황제에게는 만세(萬歲)를 불렀기 때문이다.

 

전각 안을 들여다보니 왕이 앉는 용상 뒤에 그림이 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좌우에 해와 달의 그림이 있고 그 아래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그래서 일월오봉도이고 그것을 병풍으로 만드니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다. 하늘에는 하늘과 해와 달(天) 그림 아랫쪽에는 여러 가지 문양의 십장생과 그 아래에 땅(地)이 있다. 즉 하늘과 땅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당연히 사람(人).이것을 차례로 놓으면 석(三)자가 된다. 그림 앞의 용상에 누가 앉는가. 당연히 왕이다. 석삼자(三) 앞에 왕이 의관을 정제하고 앉거나 일어서면 임금(王)자가 된다. 땅에 사는 인간의 고락과 소망을 천자인 왕이 대신하여 하늘에 아뢴다는 민본주의 사상이 담긴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중국에서 온 것으로 알면 착각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가장 완벽한 음양오행의 사상인 풍수지리가 포함된다. 즉 완벽한 명당이다. 왕이 가는 곳 어디에나 이 그림을 병풍삼아 그 앞에 앉는데, 이것은 왕이 가는 곳이 곧 명당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덕수궁 드므(넓적하게 생긴 그릇으로, 순우리말). 궁궐의 전각앞에 두어 방화목적으로 사용했다. 드므의 옆면에 만(卍)자가 보인다. /한선생 제공

 

중화전에서는 잊지 못할 역사의 사건도 있었다. 황제 양위식이 있었던 1907년 7월 20일로 돌아가 보자.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어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했던 고종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특사 3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매섭게 몰아쳤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1억엔에 팔려고 했던 송병준을 비롯한 대신들이 가슴에 총을 숨기고 들어가 고종을 겁박했다. 결국 고종은 순종의 대리청정을 허락했을 뿐인데 일제는 몸과 맘이 허약한 순종을 황제의 자리에 앉힌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 양위식은 열리게 되었다.

 

▲ 중화전(中和殿)의 정문 중화문(中和門) /한선생 제공

 

그런데 정작 행사장에는 이양식의 당사자들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다만 고종과 순종의 옷을 입은 두 명의 내시가 있었을 뿐이다. 당사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황제 이양식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각국의 언론기관에 보도자료로 보냈다. 소위 언론플레이를 한 거다. 이러한 치밀한 계략으로 고종과 순종의 양위식은 기정사실화되어 고종은 경운궁의 이름이 바뀐 덕수궁에 반 강제적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갇혀 사는 몸이 되었다. 왕의 존엄이 가장 잘 드러나야 할 궁궐의 정전에서 나라와 백성, 왕의 안위를 목숨을 바칠지언정 지켜야할 대신들이 황제를 겁박하여 양위시킨 것이다.

 

이 사건이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양위를 취소하라는 백성들이 대한문으로 몰려들었다. 의병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것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으니 며칠후인 7월 3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해산되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부터 약 110년 전에 이곳 중화전 앞뜰에서 일어난 일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보물 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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