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00년②…분열과 독선으로 패배한 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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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년②…분열과 독선으로 패배한 백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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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차크, 데니킨등의 성공에도 불구, 사회혁명당·소수민족과의 연대에 실패

 

혁명은 전쟁을 수반한다. 그 전쟁은 내전일수도 있고, 외국과의 전쟁일수도 있다. 때론 내전에 외국이 간섭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영국에서 청교도 전쟁,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발발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에서도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1920년 사이에 수십만명을 살육하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다.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키려는 적군 사이의 내전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의 개입을 동반하면서 복잡하게 전개됐다.

그러면 왜 백군은 소수 음모가로 구성된 볼셰비키에 패했을까. 절대 군사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백군이 적군에 밀린 것은 아니다. 지금은 영화나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백군의 실태를 살펴보자.

 

▲ /위키피디아

 

1917년 11월 러시아 공상당내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한다. 하지만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혁명당(SR: Social Revolutionary)이 40%의 의석을 얻어 제1당을 차지하고, 볼셰비키는 대도시에서만 지지를 얻어 22% 득표하는데 그쳤다. 볼셰비키는 혁명운동을 할 때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의회)로”라고 주장했지만, 막상 선거에서 의회를 장악하지 못하자 1918년 1월 제헌의회를 해산했다. 볼셰비키의 거짓말과 폭력에 사회혁명당원들이 반발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취약했다. 1차 대전 중이어서 독일군이 서부지역을 점령해 모스크바로 진격해오고 내부적으로는 사회혁명당과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지주층등 반혁명세력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혁명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혁명 이념의 전파보다는 일단 생존하기로 결심한다. 혁명이 실패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진다면 혁명의 기반이 사라지게 된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레닌은 판단했다.

그는 독일과의 휴전을 제의한다. 독일도 서부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볼셰비키 정권과 독일등 동맹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wsk) 조약을 체결해 전선에서 발을 뺀다. 조건은 가혹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점령한 지역을 동맹국에 넘겨준다는 조건이었다. 러시아 인구의 4분의1이 거주하고 공업 및 농업의 3분의1을 생산하는 차지하는 알토란 같은 영토를 적에게 넘겨준다는 굴욕적 정전협정은 사회혁명당은 물론 러시아 민족주의자, 군부를 자극했다. 레닌은 이 조약으로 볼셰비키가 ‘숨쉴 틈’을 얻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볼셰비키에 중립적이던 많은 러시아인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볼셰비키는 곡물을 징발함으로써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어느 농민은 곡물을 수탈하는 볼셰비키에게 “권력은 당신들 것일지 모르지만, 감자는 우리들 것이요”라며 대들었다고 한다.

 

혁명 직후 몇 달간은 조용했다. 반볼셰비키들은 반발은 마음 속으로 새기고 구체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 정부가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를 공격하며 특권계급을 차별하고 시민의 자유를 구속하자 산발적인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18년초 남러시아에서 일부 고위 군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볼셰비키에 의해 즉각 진압됐다.

역사의 필연은 우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사라예보의 총성이 1차 세계대전을 점화시켰던 것처럼....

대규모의 반혁명 운동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체코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눌려 지내던 체코인들은 러시아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보헤미아를 독립시켜달라고 러시아 차르(황제)에게 청원했고, 니콜라이 2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체코인들은 일부 슬로바키아인을 합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해 러시아에 들어와 동맹국에 대항해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볼셰비크가 정전협정을 체결하자 체코 군단은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극동으로 가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유럽 전선에 참여하겠다고 볼세비키 정권에 요청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체코인들이 첼랴스크에서 서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대라고 있는데, 정전 협정에 의해 동쪽 방향으로 귀국하던 헝거리 포로들과 부딪치며 소동이 벌어졌다. 이국 땅에서 민족간 앙금이 폭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폭동에 볼셰비키는 체코인들의 주장을 무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첼라빈스크시를 점령하자 볼셰비크키들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체코 군단의 저항이 시작됐다.

첼라빈스크는 시베리아철도의 기점이다. 체코 군단이 이 거점도시를 점령하자 러시아 영토의 3분의2를 차지하는 시베리아가 통제불능의 상태에 들어갔다. 중앙권력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1918년 11월 사회혁명당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했다. 적군과 백군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후 반혁명세력들은 전쟁영웅인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Kolchak) 제독을 시베리아 정부 수반으로 선출했다.

 

▲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백군을 사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9년 콜차크의 백군은 승승장구하며 볼가강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콜차크는 승리에 힘입어 최고통치자로 러시아 전역의 백군과 연합국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콜차크는 군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편협하고 감정적이었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백군에 가담한 사회혁명당 당원들, 체코 연대와도 불화를 빚었다. 고집불통으로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했다. 변덕스럽고 우우부단했다. 게다가 인민들을 이끌 매력적인 경제정책이나 정치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든지,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지지지들은 군사적 수완에만 의존했다. 결국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 사회혁명당은 콜차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볼셰비키들도 모든 병력과 물자를 콜차크 군대와의 전쟁에 쏟아부었다. 콜차크의 백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백군은 옴스크를 적군에게 내주고 이르쿠츠크로 후퇴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체코 군단이 배신을 때렸다. 그들은 콜차크를 체포해 볼셰비키에 넘겨주고, 안전하게 체코로 돌아가게 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19년 1월 콜차크는 얼어붙은 앙가라 강가에서 총살돼 수장되었다.

 

▲ 안톤 데니킨(1915) /위키피디아

또다른 백군은 코사크족(Cossacks)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그리스정교를 믿는다는 점에선 같지만, 유목민으로 러시아족과는 독자적으로 살아온 종족이었다. 피오트르 크라스노프(Peter Krasnov)라는 코사크족 추장이 모스크바 남동부 돈강과 쿠반강 지역을 거점으로 소비에트 통치를 뒤엎었다. 이들은 볼가강 유역의 주요도시인 차리친시를 포위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이끄는 볼셰비키군은 간신히 코사크 백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차리친을 방어했다.

돈강 남쪽에선 또다른 코사크인들이 수천명의 정예군대를 조직해 1918년 여름에 적군에 대해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서베리아에서 콜차크가 서진하고 있을 때 동부와 중부 우크라이나에는 안톤 데니킨(Anton Denikin)의 백군이 모스크바를 위협했다. 데니킨도 콜차크만큼이나 볼셰비크를 위협했다. 데니킨의 백군은 우크라이나 중부 및 남부, 러시아 남부를 광범위하게 장악하고 두차례나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한번은 모스크바 서쪽 400km나 접근했다.

하지만 데니킨도 콜차크처럼 독선적이었고, 지나칠 정도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반유태주의자였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는 그는 독실한 그리스정교 신자였다. 그는 유태인들이 공산주의를 만들었다고 믿었다. 칼 마르크스, 레온 트로츠키가 유태인이고, 공산 혁명은 유태인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백군은 점령한 마을에서 유태인을 색출해 집단 처형했다. 1918년 9월 한 도시에서 4,000여명의 유태인들이 학살하기도 했다. 이들 백군의 테러는 아직도 이스라엘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데니킨 백군의 최대 약점은 데니킨 자신이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보수적 종교관은 노동자와 농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남부의 백군들은 군사적으로 도움을 줄 우크라이나인, 발트 민족, 필란드인, 폴란드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데니킨은 1919년말 볼셰비키군에 패한후 사임 압력을 받아 그만두고, 백군 지휘권을 피오트르 브란겔(Peter Vrangel) 장군에게 넘겼다. 하지만 1920년 여름 남부 백군은 크리미아 반도에서 볼셰비키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기력을 소진했다.

이외에도 1918년 후반 독일점령지역인 북서부지역에서 니콜라이 유데니치 장군이 이끄는 백군이 궐기했지만, 독립을 원하는 에스토니아인들과 핀란드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면 백군은 왜 실패했나.

가장 큰 이유는 분열이다.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 북서부에서 백군이 궐기했지만 서로 연결이 없었다. 콜차크와 데니킨은 서로 자기 휘하의 주둔지와 병력에서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서로의 힘을 합치지 않았다.

비러시아계 소수민족과의 연대도 형성하지 못했다. 지도자들이 지나차게 대러시아 민족주의에 빠져 소수민족의 독립 여망을 반볼셰비키 운동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사회혁명당 등 좌파진영 가운데 반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도 하지 못했다. 콜차크는 오히려 이들과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둘째, 외국에 너무 의존했다. 콜차크는 영국군의 지원을 기대했다. 하지만 1차 대전 종전으로 외국군들이 철수하고 지원을 줄이면서 자력으로 내전을 치러야 했다.

셋째, 농민을 추스르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농민들은 적군과 백군 사이에 중립을 지켰고, 사회혁명당이 기반으로 하는 계층이었는데, 토지를 귀족층에 되돌려주는 백군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지나친 보수적 그리스정교에의 회귀는 교회의 착취를 받은 농민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비해 볼셰비키는 중요한 이점을 잘 활용했다. 그들은 러시아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 남부와 동부, 북부에서 공격해오는 백군들을 각개 격파로 분쇄했다. 동쪽을 방어하다가 그쪽을 제압하면 그곳 병력을 빼서 남쪽 전선으로 파견하는 식으로 백군의 분열을 적절히 활용했다. 러시아의 중심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백군지역보다 생산력이 높았고, 보급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게다가 볼셰비키는 백군과 소수민족과의 결합을 교묘하게 유리시키며 백군을 소수화하는데 성공했다.

 

1918~1920년 사이의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함으로써 국제사회에 공산주의 이념이 구체적인 영토를 확보하며 세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으며 생존하려는 레닌의 의도가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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