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통일비용 절감방안⑥…러시아 토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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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통일비용 절감방안⑥…러시아 토지제도
  • 손봉균
  • 승인 2017.09.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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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리핀의 농노해방령 실패…러시아 혁명으로 토지분배

 

 <지난 번 글에서는 통일 후 북한의 경제개발을 위하여 필요한 철도와 도로의 건설계획안을 설명하였다. 이 번 글에서는 북한의 토지를 통일 후 처리하는 방침을 수립할 때, 참고할 필요가 있는 러시아 토지제도의 역사를 설명하겠다>

 

▲ 손봉균씨

 

6. 러시아의 토지제도 변천

 

(1) 러시아의 상황

 

- 16세기에 중·서 유럽에서는 농노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649년 러시아 법전에 농민들을 재산처럼 다룰 수 있는 권리를 지주에게 부여하고, 농민의 복종조건이 규정되면서 오히려 농노제도가 주요제도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러시아의 모든 땅은 국가, 귀족,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800년 현재 3,600만 인구의 절반이상인 2,000만명이 <사람보다도 오히려 짐승에 가까운> 비참한 농노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 농노는 2종류로 구분할 수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주인에게서 일정한 집과 땅을 받아 농사를 지어 일정액의 돈과 농산물 또는 가축을 바치는 경작농노의 생활 역시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땅은 전혀 없이 주인집에 살면서 그 집안의 온갖 잡일을 다하고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가속농노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 이러한 비인도적 착취의 사회적 바탕위에 짜리즘은 서 있었던 것이다. 귀족인 자신들은 그 짜리즘의 보호아래 현실적인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2) 농노해방령

 

- 러시아 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농노의 불만은 농민반란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 위협은 점차 증대하고 있었다. 1848년 한해에만 107개의 농민반란이 일어 났으며 1854년에서 1855년에 이르는 농민반란은 더 이상 농노제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배계급에 깨우쳐 주었다.

- 증대되는 위협을 해소하기 위하여 1861년 알레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년)는 농노해방령을 선포하였다. 우선 국가는 농노가 생계를 영위할 만한 농토를 분배받도록 보장한다고 선언했고, 이 원칙에 따라 농노들이 지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경작하던 농토를 분여지라 하여 나눠주었다. 농노해방령에 따라 농노는 법적으로 해방되었다.

- 그러나 농노의 해방은 지극히 기만적이었으며 <해방농노>는 사실상 다른 형태의 경제적 예속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불리하게 되었다. 국가가 나누어 주는 분여지는 농민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르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어서 농민은 미르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여지도 농노의 수에 비해서는 불충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토지매수금도 농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싸게 책정되었다.

- 분여지를 받는 농노은 그 매수금의 20%는 지주에게 직접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 80%는 국가가 지주에게 물어주지만, 농노는 49년간 6%의 높은 이자를 포함해 정부에 갚아야 했다. 그런데 이 매수금과 상환금 때문에 농민은 결과적으로 더 불리하게 지주에게 매이는 꼴이 되었고, 이 때문에 농민과 지주는 더욱 적대적인 계급이 되었다.

 

(3) 스톨리핀의 농업개혁

 

- 1906년 스톨리핀이 수상에 취임했다. 스톨리핀은 수상취임전인 1905년 서신 한 장을 황제에게 보냈다. “농민의 토지소유는 질서를 보장해 주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각 소유주들은 국가의 안정을 떠 받쳐주는 핵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농민들을 정치적 안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바꾸려 했다.

- 스톨리핀은 1861년의 농노해방의 문제점은 그것이 농촌공동부락체인 미르를 그대로 온존시키고 그 기능을 조장함으로서,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 확보를 어렵게 만들어 실질적인 사유재산계급을 만들어 내지 못한데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의식이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농민은 서구의 농민들처럼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생산하는 집산주의적인 이념에 쉽게 젖어든다고 보았다.

- 그래서 스톨리핀은 러시아에 실질적인 사유재산 계급을 만들어 내기로 결심하고, 1906년 8월 농업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정부가 농민들에게 국유지, 차르의 사유지, 황제일가의 사유지 중에서 적당한 양을 팔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 농민들에게 평등한 시민권과 개인적 권리를 부여했다. 이어 미르에서 탈퇴하여 자기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소유자가 되도록 장려하는 토지법과 농촌자금 대여법을 제정 실시했다.

- 이와같이 스톨리핀은 농업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공동부락체인 미르를 깨뜨려 나가기 시작했다. 실시과정에서도 여러 차례의 보완을 거치고 농민에게 정부의 재정 및 행정상의 지원을 하면서 토지개혁령을 밀고 나갔다. 그 목적은 농민 중에 유산층을 만들어 내고, 그 유산층을 현존 질서를 옹호하는 농민지지층의 핵을 삼으려 한 것이다.

- 그러나 개혁이행과정은 복잡하고 더딜 수밖에 없었다. 시작단계부터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고, 1914년(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그 속도가 현저히 더뎠다. 그 이유는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의 반대와 차르가 스톨리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다만 1906년부터 1914년 사이 1,002만 농가세대의 600만 농민이 개인의 명의나 가족의 명의로 사유토지를 갖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은 이 토지개혁안이 최소한 농민의 관심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 이러한 스톨리핀의 토지개혁령 등 개혁정책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나는 살아 생전에 혁명을 볼 것 같지가 않아>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즉 정부가 정책을 잘 못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많아야 혁명의 성공가능성이 높은 데 스톨리핀처럼 정책을 잘 하면 혁명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 스톨리핀은 1911년 9월 범행동기가 불분명한 어느 괴한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스톨리핀이 피살됨으로써 개혁정책이 추진 동력을 잃어 흐지부지 되었고, 그 6년 후인 1917년에 레닌의 공산혁명이 성공한다. 암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 표트로 스톨리핀(Pyotr Stolypin) /위키피디아

 

(4) 공산혁명 후의 레닌의 농업토지정책 발표

 

- 공산혁명(1917년 11월 볼세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그 다음날 일련의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 중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내용은 농지f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한 것이다. 귀족들의 재산권을 박탈하고, 농촌지역의 토지는 농민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토지위원회와 농민 대표들로 구성된 지역소비에트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 레닌은 볼세비키의 토지계획안인 국유화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했다. 지금으로서는 토지에 목 말라있는 농민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더 이상 지주들에게 굴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레닌은 이 한 가지 정책만으로도 최소한 농민들의 일시적인 지지를 얻거나 또는 중립적 입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민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5) 적군이 백군을 이기다

 

- 1918년부터 3년간 계속된 적군과 백군의 전쟁에서 적군이 승리하여 공산혁명은 완성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백군과의 전쟁에서 적군이 이긴 이유는 백군의 내분, 전략적 요충지의 점거 실패, 트로츠키의 효율적인 적군 조직 등 많은 이유가 있으나,

- 가장 큰 이유는 농민에게 농지를 분배함으로서 절대다수인 농민을 우호세력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중도세력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 반해 백군은 구질서를 옹호함으로서 농민을 포함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 우리나라에도 6.25전쟁 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 정부수립후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하여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으나, 북한은 토지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 한국전쟁을 연구한 한 연구자에 따르면, 북한의 토지국유화 정책도 6.25전쟁에서 남한이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 6.25전쟁에서 남한이 이긴 근본이유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참전이었으나, 세부적으로는 징병된 남한출신의 북한 군인들이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도 전세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전쟁 수행 중에 남한사람을 징병하여 부족한 군인을 충당하였다. 즉 징병된 남한사람들을 북한 군인으로 전투에 투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징병된 남한출신 군인들은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이 이기면 분배받은 농지를 몰수당하고, 다시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6) 역사적 교훈

 

- 러시아와 6.25전쟁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보면, 작은 땅이라도 소유하여 유산계급이 되면 그가 속하는 국가 또는 체제에 대하여 최소한 중도적인 입장이 되어 국가의 안정에 핵심세력으로 기여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 다시 말하면 작은 땅이라도 갖게 되면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평소의 정책에 대한 입장, 전쟁(내전 포함)이 일어났을 때 보수적이며 체제 옹호적인 성향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공산혁명 후의 적군과 백군의 전쟁에서도 적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한 것은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로 농민을 최소한 중도세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통일후의 북한 토지문제처리에 있어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한 손봉균씨가 공무원 재직시의 업무경험을 바탕으로 통일후 북한의 철도,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효율적으로 건설하는 방안을 시리즈로 제시한다. 이 방안은 북한개발을 앞당기고,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활성화하며, 통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방안이 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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