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조선시대 칠패시장
상태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조선시대 칠패시장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9.21 1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만든 시장…남대문~서소문 사이

 

정부와 시장(market)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시장이 이긴다.

조선시대에 시장은 관이 운영했다. 종로거리의 육의전이 그것이다. 조선은 장사를 하려면 나라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성리학의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상업은 말업이다. 사대부들은 상업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농업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였고, 농본사상이 근본을 이루던 시절이다.

조선 시대엔 상인들이 관청의 허가를 받은 뒤에야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허가받은 상점들을 ‘시전’이라고 했다. 시전 상인들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거나 장사한 뒤 남은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바쳤다.

하지만 농업이 피폐하면 농민들이 농토와 유리(遊離)된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장사라도 해야 한다. 관이 허가하는 상인 이외에 자생적인 시장이 생겨난다. 그것이 칠패시장이다.

서울 도심 남대문에서 신한은행 본점 건물로 가다보면 칠패시장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볼수 있다. 이 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18세기경에 시장이 생겨났고, 개항 이후에는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이 칠패시장에서 상권을 다투었던 곳이다.

 

▲ 칠패시장

 

칠패(七牌)시장의 위치는 숭례문에서 서소문까지의 일대다.

조선시대에는 한 무리를 지칭할 때 패(牌)라는 단위를 썻다. 지금은 1조,2조 할 때 組로 쓰고 패라는 말은 불량배나 깡패등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하지만 이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바뀌어진 말로 보면 된다. 그러면 7패는 하나의 행정구역 단위로 생각하면 어떨까?

한양도성은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와 같은 3군문(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으로 나누어 지키게 했다. 그중에서 어영청의 1패에서 8패중 7패에 해당되는 구간앞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칠패시장이다. 1패의 단위는 보통 소대와 중대단위의 약 40~50명사이의 규모로 보면 된다.

칠패시장에서 처음 노점을 차린 상인들은 대부분 농촌이 어려워지자 살길을 찾아 서울 등 도시로 몰려들어 자본도 별로 없이 근교에서 반입되고 있는 물품을 받아서 도성 내의 길거리에서 늘어놓고 팔았다. 그러나 이런 상업 행위는 난전이라고 하여 제재를 받자 남대문 밖의 칠패에 가게를 벌였다. 그러나 칠패까지 시전상인들의 규제가 미쳐오자 칠패상인들은 이를 피하고자 대체로 어물전의 중개인 구실을 했다.

 

칠패시장은 18세기에 종로시전(鍾路市廛), 이현시장(梨峴市場)과 더불어 3대 시장을 형성했다.

종로시전은 종로와 남대문로에 丁자 형태 육의전을 비롯해 2000개의 가가로 형성된 공인받은 시장이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성곽주위로 사람들이 증가하며 자연스럽게 민간 주도의 칠패시장이 형성되었고, 100년후에는 동대문의 이현(배오개)시장이 형성되었다.

동대문에 배오개길이 있다. 그 배오개가 이현시장의 자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칠패시장에서는 주로 어물을, 이현시장에서는 채소를 팔았다고 한다.(東部菜 七牌魚)

그것은 한강과 관계가 있다. 한강은 5강이라하여 5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현재 위치와 지명으로 보면 광나루, 마포, 용산, 노량진, 양화진이 그것이다. 그중에 마포나루가 가장 컷다. 지금의 마포대교를 통과해보면 마포앞 한강 폭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용산에서 넘어오는 강물과 서해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이 만나는곳이 마포였다. 그러다보니 엄청 큰 호수와 같은 큰 강폭이 형성되었으니, 이름하여 큰 강의 호수와 같다하여 西江이라 했다. (그러면 마포의 동쪽에는 동호가, 서쪽에는 서호가 있는 것이다. 마포를 기준으로 한 동호대교, 서강대교라 이름짓는 어원이 되었다)

 

▲ 육의전 /한선생 제공 /힌선생 제공

 

마포는 남한강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집산지로서 제재소가 많았고 고기를 잡아 보관하는 옹기집이 많았다고 한다. 목재를 만지다보니 목에 먼지가 많이 끼었고 그 컬컬함을 없애기 위해 마포에 고기집이 성행했었다. 지금도 마포에는 오래된 유명 음식점들이 많다. 특히 서해에서 잡아오는 새우젓이 많이 올라왔다. 상인들은 강화에서 올라온 새우젓과 생선을 지게에 싣고 만리재고개를 넘어 칠패시장에서 팔았다. 새우젓장사는 아침에 해를 받으며 지게지고 올라오기 때문에 이마가 검게 탔다고 하고, 이현시장의 채소장사는 해를 등지고 오기 때문에 뒷목덜미가 새카맣게 탔다고 했다. 그래서 얼굴과 목덜미만 봐도 이 사람이 칠패시장의 새우젓장사인지, 이현시장의 채소장사인지 알았다고 한다.

또 한가지.. 옛날 사람들은 지갑이 없었으므로 남자들은 큰 도포자락에 끝 소매에 돈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오른손으로 돈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하여 오른손 소매에 돈을 넣고 왼손으로 돈을 집어 물건값을 지불하였는데 일종의 모리배들이 팀을 형성하여 앞길을 막고 말을 시키다가 옆에 있는 사람이 소매를 툭치면 안에있던 돈이 빠져나오는데 그것을 주워 가져 갔다 하는데 그것이 <소매치기>의 유래라고 한다. 그 소매치기가 성했던 곳이 칠패시장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칠패시장에 와서 물건을 팔고 사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오늘은 옛날을 생각하며 마포에 가서 소주에 돼지갈비를 먹어봄직 하지 않은가? 마포나루에서 새우젓을 떼다가 그 경사진 만리재 고개를 땡볕받아가며 날랐을 우리와 같은 민초를 생각하며 말이다. 그들이 왜 고생을 했겠는가? 집에 있는 처자식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들은 식솔들을 먹여 살리느라 참 고달픈 것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