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석만 남은 시위병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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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만 남은 시위병영 터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9.09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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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된 조선 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 벌인 현장

 

서울 중구 서소문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것에 ‘시위병영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해 조직된 시위대의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되고, 시위대 군인들은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였다.

 

서소문을 둘러보면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과 맞닥트리게 된다.

일제는 1907년 7월 정미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인 군대를 해산시켜 국가 존재의 기본 요건까지도 없애 버렸다. 국가와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군대인데... 그 군대가 없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정미조약으로 조선의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받게 된다. 시위(侍衛)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참령(參領)이 해산명령을 듣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참령은 소령정도의 대한제국의 계급이다.)

이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한 1연대 1대대원들과 2연대 1대대원들이 무기고에서 소총과 탄약을 탈취하여 현대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600년 역사의 한양도성에서 처음 있었던 전투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수도인 한양 내에서의 전투는 없었다.

 

▲ 남대문전투 /한선생생 제공

이른바 남대문 전투였다. 초반에는 조선군이 기선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숭례문에 2문의 기관총을 걸고 서소문 근처에 있는 조선군 시위대병영으로 마구 쏘는 화력을 구식무기로 무장한 조선 시위들은 당할 수 없었다. 또한 공병대까지 동원한 일제는 그들이 설치한 화약이 병영내에서 폭발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전투는 한나절을 지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희생된 120여구의 시체를 또 다른 시구문인 광희문에 버려두었다.

가족들의 곡성(哭聲)이 몇날며칠 이 일대에 울렸다. 마치 5.18.광주항쟁때 가족들이 시민군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남은 군인들이 그 후 의병항쟁에 뛰어들었고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군인들의 참여로 강화된 조직력을 갖추게 된 의병은 1908년 양주에 집결, 동대문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른바 서울진공작전이다.

한일병탄을 앞두고 일제는 이들 의병들을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었다, 1909년 2천여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남한 대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무수한 민간인들이 의병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1만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조선 땅에 행했던 작전을 아는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한다.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썼던 작전이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해가는 작전이었다. 이 과정을 취재한 영국데일리메일기자는 <조선의 비극>이라는 기사에서 의병장 류인석의 고향 제천을 취재했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 햇살이 뜨거운 여름이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 있을 따름이다. 완전한 벽하나, 기둥하나, 된장항아리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위에 싹 지워져버렸다.”

지도위에 남아있지 않다니.... 불과 110년전에 일어났던 의로운 투쟁과 그속에서 참살된 비참한 역사를 아는지...

▲ 옛 서소문 /한선생 제공

지금도 옛 서소문이 자리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소문고가도로 시작하는 곳에 위치한 서소문로에는(국민은행 앞) 시위병영터(侍衛兵營址) 라는 조그만 표지석이 비오는 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시위병영 터 표지석 /한선생 제공
▲ 시위병영 터 표지석 /한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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