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의 대권도전⑨…정치권력과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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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대권도전⑨…정치권력과 함수관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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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바람막이 사라지면서 권력 변동이 후임 경영자에게 새로운 부담

 

박태준은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포철을 경영했다.

그는 포철이 성공하려면 먼저 우수한 인재가 정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주와 함께 「플러스 알파」 즉, 자녀교육과 부인들의 문화생활까지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공장건설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직원들의 사택을 건설하지 시작했다.

이와함께 그는 사택단지내에 유치원에서부터,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국내최고수준의 학교들을 건설해 나간다. 직원가족들의 정서생활을 위해 파이프오르간시설까지 갖춘 음악당과 쇼핑센터등 문화시설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그는 국회가 열릴 때마다 “나라의 돈으로 공장은 안 짓고 쓸데 없는 짓한다”는 공세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코 복지를 위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직원가족들의 마음까지를 포철에 대한 긍지와 사랑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언젠가 포항과 광양을 둘러본 구소련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은 “마르크스-레닌이 꿈꾸어온 노동자의 천국이 포철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혹자는 박태준을 가리켜 「불도저식」혹은 「카리스마적」경영자라고 비판한다.

사실 그는 그랬다. 그는 결정된 방침은 일사불란하게 밀어부쳤으며 부정이나 부실공사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했고 제철에 관한 한 최고의 카리스마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는 원칙에 벗어나는 행위를 한 직원의 쪼인트를 까기도 했고 부실공사를 이유로 80%나 진척된 건물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공사에 참여한 업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태준 스스로도 “70년대 초반의 우리수준에서 내가 인격자연해서는 아무일도 되지 않았다. 포철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인격조차도 버려야 했다”고 자신이 포철을 혹독하게 조련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박태준을 「운이 좋은 경영자」라고 한다. 사실 그에게는 운도 따랐다. 포철은 20년간 계속 설비를 증설해왔는데 한번의 예외도 없이 신통하게도 경기순환과 맞물려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이란 몇번이고 되풀이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는 항상 “최고경영자는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는 자세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공부했다. 그는 철강에 관한 책이면 빠짐없이 읽었다. 경기변동이나 미래학에 관한 서적들에도 탐닉했다.

 

그는 세계적인 철강전문가나 경제전문가들을 만나 자문을 얻는 일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포철 내에 경제조사와 경기예측을 담당하는 방대한 경영조사부를 설치하고 항상 자문을 받았다. 포철의 엘리트치고 이 부서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해도 과언은 아닐정도다. 그를 따라다닌 운이란 이처럼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가 빚어낸 통찰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박태준은 젊은 시절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기계학을 공부했다. 그는 귀국해보니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당시 문과계통을 공부한사람들은 취직할 자리가 있었는데 이공계통은 공부한 사람들은 취직할래도 취직할 수가 없었다. 공장하나 변변한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공계통 졸업자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수학, 물리나 가르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태준은 육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소대장을 지낼때 6.25 전쟁이 터졌다.

박태준은 중대장으로 진급, 전쟁에 참가했다. 소속한 부대에는 당시 중대장 12명이 있었는데 그중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 박태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6.25 기간 3년을 참전한 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은 박정희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군사정권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중석과 포항제철에서 30년간 경제건설을 위해 달려왔다. 마지막에 노태우 대통령이 도와 달라고 해서 박태준은 정의롭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돕는다는 뜻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철강인생의 마지막 몇년동안을 박태준은 “적어도 포철의 울타리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내키지 않았던 정치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렇게 길지 않은 정치생활을 끝으로 그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박태준의 포철 경영박식은 때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합리적으로 간주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컨데 골프금지령과 목욕론이다.

1989년 광양제철소에 냉연공장이 처음으로 준공됐을 때였다. 이 냉연공장은 국내 자동차및 가전용 고급강판을 공급키 위해 최신설비를 갖추었는데 어떤 원인인지 조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박태준은 며칠간 고심한 끝에 광양제철소 간부들의 골프실력을 점검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당시 광양에는 직원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6홀 규모의 골프장을 새로 지었는데 몇몇 간부들은 1년 동안 부지런히 연습해 실력이 부쩍 향상됐다.

박 회장의 지시로 광양제철소 간부들의 골프실력은 수준급으로 판명됐는데 박태준은 실력이 월등히 향상된 간부의 골프장출입을 금지시켰다. 그 결과 제3 냉연공장의 조업은 순조로와 졌고 높은 품질의 제품을 얻게 됐다는 것.

박태준의 목욕론은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즉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하면 옷을 청결히 입게 되고 작업장에서 정리정돈을 말끔히 해 결국 제품의 품질이 높아진다는 논리다. 70년대초 포철창립초기시절 박태준은 직원은 물론 직원부인에게까지 목욕을 강조했다. 당시 사보편집장이던 이모과장은 박태준의 목욕론은 꼬집다가 질책을 받았으나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주장, 후에 부사장까지 승진한 케이스도 있다.

 

박태준의 국제적 위상은 포철의 위상으로 동반상승했다. 미국 일본 유럽 중국 인도 남미등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했지만 그는 특히 일본통이었다.

박태준은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시 퇴계학 원로인 야스오카(安岡)씨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60년대말 일본 정재계를 설득, 대일청구권자금을 포철설립 자금으로 전환했다. 이때 그는 “선조의 피와 대가로 후손은 쇠를 만들겠다”며 포철 설립의 집념을 보였다. 80년대 들어 마유미 사건 김만철 사건등 한일현안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포철=박태준」의 신화가 창조되기까지 정치권의 외풍으로부터의 보호가 절대적이었음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 3공 시절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았다. 이 전권위임장은 조선시대로 치면 암행어사의 팔마패에 해당했고 일본 토쿠가와(德川) 시대의 發紋에 비유됐다.

80년초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일단 위기에 처했으나 위기에서 벗어나자 그는 전국구 의원직을 맡아 정치권과의 연계를 맺는다. 그는 또 전두환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씨에게 협력회사를 떼주었으며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는등 권부와 타협을 모색한다.

6공 들어서는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맡았으며 나중엔 집권당 실력자로 등장, 대통령 출마를 꿈꾸기도 한다.

포철과 정치권력. 이는 포철 25년간 밀접한 함수관계를 이루며 변화해왔다. 정치외풍으로부터의 보호 아래 포철은 낙하산 인사배제, 정치자금 요구거절, 효율적인 투자를 이룰수 있었고 25년간의 박태준 왕국이 유지된 것이다.

그가 자기인생을 걸다시피했던 포철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93년 4월 18일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철강협회특별이사회에서 포철은 조강생산 2,100만톤으로 세계 제2위의 철강회사로 인증을 받았다. 조강능력 면에서 일본의 新日鐵 2,600만톤, 프랑스의 유지노사실로 2,110만톤으로 포철보다 앞섰지만 유지노사실로의 미국과 독일 공장을 빼면 자국내 생산능력으로 포철에 뒤진다는 것이다.

이제 포철은 박태준 자신이 말했드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있다. 철은 「산업의 쌀」이요, 철강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다. 영국 미국의 산업발전과정에서 철강산업이 모티브를 제공했고 일본성장의 원동력은 철강업이었다. 포철은 우리경제 성장에 엄청난 기여를 했고 신화를 창조했지만 그 앞날은 더이상 신화로 남아 있을 여건이 아니다.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했던 포항 백사장과 광양 갯벌에 세계 제2위의 제철소가 설립된 것이다. 일본의 신일철이 기존의 여러 제철소를 합쳐 설립됐다는 점에서 포철은 단일건설 규모로는 세계최대의 제철회사다. 박태준과 포철의 신화가 완성돼 국제공인을 받았다고나 할까.

완성된 포철신화, 포철의 후임경영자들이 짊어지고 갈 짐이요, 버티고 설 토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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