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영혼이 떠도는 서소문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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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영혼이 떠도는 서소문공원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9.0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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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참수장이 있던 곳…정약종등 천주교 신자 순교지

 

서울역에서 염천교 사거리를 지나면 만나는 곳이 서소문공원이다. 지금 이 공원을 놓고 시끄럽다. 지난해 2월 정부와 서울시가 이 공원을 역사공원으로 만들겠다며 착공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 곳을 천주교 성지로 만드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서 역사공원으로 만들자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어떤 이는 차제에 순교성지로 이름을 바꾸자고 한다.

땅은 파헤쳐지고 공사에 들어갔지만, 막상 공원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일단 논쟁을 피해 여기서는 종래의 이름인 서소문 공원이라고 하겠다.

서소문 공원의 주변 지형을 먼저 살펴보자. 큰 물길이 보인다. 만초천이다. 한양 도성 안에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대표적 명당수인 청계천이 있다면 성밖 만초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대표적 물길이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인 무악에서 발원한 물길은 영천시장앞에서 석교라는 돌다리를 지나게된다. 다리의 윗동네라하여 교북동, 아랫동네 교남동이다. 안산과 인왕산의 평평한 동네라하여 평동이다. 찬 얼음물과 같은 샘이 있는동네라 하여 냉천동이며 그 샘이 영험하여 먹는 사람마다 병이 나으니 영천이라 부른다.

이 물길이 녹십자병원 앞을 지나면서 형성된 다리가 경교. 경기감영 앞에 잇는 다리라 한다. 경교 앞에 있는 집이 경교장이니 백범 김구 선생님이 해방 후에 사시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경교를 지나 농협, 이화여고앞을 흐르게되니 서소문아파트가 휘어진 내력을 알겠다. 물길이 휘어진 곳을 복개하여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그 물길이 지금의 한국경제신문 앞에서 선회하여 큰 모래사장을 형성하였고 그곳을지나 청파,원효를지나 한강으로 물길이 빠졌다. 조선 초기에는 한강에서 만초천을 따라 작은 배가 다니기도했는데 농포라는 포구도 있었다고 한다. 물길을 깊게 파서 운하를 만들려는 논의도 있었다고 하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 무악에서 발원한 하천을 복개한 자리에 세워진 서소문 아파트. /한선생 제공

 

여기 서소문공원앞 넓은 모래사장이 조선 제일의 참수장이다. 만초라는 넝쿨식물이 천을 따라 많이 자란다하여 만초천이라 불렸고 이곳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첫 영세자 이승훈이 고향천의 이름을 호로만들어 <만천 이승훈>이 된 것이다.

왜 이곳에 참수장이 생겼을까? 정약용은 이곳을“ 곡물이 넘쳐나서 산같이 쌓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어깨가 부딪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서소문을 나와 의주로 가는 길이었으며 삼난지방(전라, 충청, 경상도)으로 가기 위해 마포, 양화로 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칠패시장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사형장을 두어 뭇 사람들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큰 모래사장은 죄인을 죽이고 그 피와 시체를 처리하기에 용이하였던 것이다.

그럼 누가 죽었는가? 대부분 천주교신자들이다. 우리나라 천주교 103인의 성인 가운데 이곳에서 참수된 사람 44명이 포함된다.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신유박해로 1801년, 정약종의 둘째아들이며 최초의 신학생 정하성이 아버지 죽임을 당한 뒤 38년후 기해박해로 이곳에서 죽었다. 뿐 아니라 정양용의 매형인 이승훈은 모진 고문으로 세 번씩이나 배교를 거듭한후 순교했다고 한다. 정양종은 내리치는 칼날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죽었는데 첫 번째 베임으로 목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성호를 그은후 두 번째 맞은 칼에 목이 떨어져나갔다.

당시에 천주교를 믿었다하여 바로 참수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자리에 있던 형조,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자리에 있던 의금부, 동아일보앞의 감옥인 전옥서와 우포도청등지에서 고초를 당하면서도 배교를 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이곳에 끌려온 것이다. 수레에 십자모양의 틀을 만들어 머리를 달아매고 양팔을 나무에 묶은 다음 발아래에는 발판을 놓았다고한다. 서소문을 통과할 때 쯤이면 발판을 치워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다. 울퉁불퉁한 길을 전 속력으로 달리면 고통과 두려움이 극대화된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죽이는 희광이들이 얼굴에 회를 칠하고 양귀를 쇠화살로 뚫어 잡아당겨 목을 평평하게 한 다음 참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 서소문 역사공원 표지판 /한선생 제공

 

세 번의 배교 후에 죽은 이승훈(李承薰)이 마지막으로 지은 글을 인용한다.

落在天水上池盡

(달이 져서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늘에 있는 것이요/ 물은 솟구쳐 위로 올라가더라도 결국 다시 내려와 연못에서 다한다)

내가 주를 배반해도 주님은 하늘에 여전히 계시다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라 하겠다. 확신이 없어 모호하고 분별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자세를 일깨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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