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화상은 서역인?…구미 대둔사 대웅전 보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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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화상은 서역인?…구미 대둔사 대웅전 보물 된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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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자가 아도화상일수도…인도 또는 페르시아계가 신라에 불교 전수

 

문화재청은 1일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구미 대둔사(大芚寺) 대웅전’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구미 대둔사는 구미시 옥성면의 복우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은 사찰로, 신라 눌지왕 30년(446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고 문화재청이 소개했다.

경상북도에는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절들이 많다. 경북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와 경북 구미의 도리사(桃李寺)도 아도화상이 눌지옹 2년(418년)에 지었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다.

 

▲ 구미 대둔사 대웅전 전경 /문화재청

 

그러면 아도화상은 누구인가.

신라는 법흥왕 15년(528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인해 불교를 인정한다. 그에 앞서 110년전에 경북 북부에 절을 세웠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에는 눌지왕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와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불교를 전파했다고 전한다. 그후 비처왕(소지왕, 재위 479~500년) 때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고 적고 있다.

 

고려때 스님(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엔 아도에 대해 훨씬 자세하게 나온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인데 정시(正始) 연간(서기 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녀와 정을 통하고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임신을 하였다. 아도가 태어나 5세가 되자 어머니가 아도를 출가시켰다. 나이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굴마를 찾아뵈었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나이 19세에 다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뭔가 맞지 않다. 서기 240~248년에 임신해 태어난 아도가 479~500년대의 비처왕때 등장하는 것은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연대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아도가 200년 이상 살았다는 말인가.

고대사의 모호함을 따져 진위를 밝힐 계제는 아니다. 이러한 사서의 혼선을 극복하고자, 승 일연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온 시기를 눌지왕 때일 것이라고 정리했다.

 

아도와 묵호자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엔 아도화상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선 묵호자라는 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지칭하는 명사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피부 색깔이 검은(墨) 서역인(胡子)’를 뜻한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묵호자와 아도를 다른 사람으로 지칭했는데, 아도가 바로 묵호자라는 것이다. 아도의 아버지가 위나라 사람이고, 성씨가 드믄 아(我)씨라는 점에서 서역으로 지칭되는 인도인. 페르시아계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서역인이 지은 절을 보물로 삼는 셈이다.

 

▲ 구미 대둔사 대웅전 내부 /문화재청

 

각설하고, 이번에 보물지정이 예고된 대둔사 대웅전은 신라때 창건되었다가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족의 침략으로 불타버렸다. 고려 충렬왕의 아들 왕소군(王小君)이 출가하여 다시 세웠고, 그 후 선조 39년(1606년)에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이 중건하여 승군(僧軍)을 주둔시켰다.

현재의 사역은 원래 대둔사의 암자인 청련암(靑蓮庵) 자리이며, 현재 자리에서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둔사 옛터가 남아 있다.

대웅전은 진입로에 요사채(스님들이 머물며 생활하는 건물), 입구 오른쪽으로 명부전, 왼쪽으로는 석축을 두고 있으며 명부전 북쪽으로 3단의 응진전 등이 남아 있다.

1987년 대웅전 수리 중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해군 6년(1614년)부터 순조 4년(1804년)까지 다섯 차례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붕에 ‘건륭31년 병술(1766)’이라고 기록한 망와(장식기와)가 다수 남아 있어 건물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대웅전은 경사지를 따라 조성하면서 앞쪽에 높은 장대석(長臺石) 석축과 계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장대석 기단과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다포(多包)계 건물이다.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팔각형 활주(活注, 추녀 밑을 받친 보조기둥)를 두었으며 창호는 정면 가운데에 꽃살 여닫이문과 배면 우측의 영쌍창(창호 가운데 기둥이 있는 창)이 고전적인 건축양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강직하면서도 장식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17∼18세기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물천장 등의 구조와 내부 닫집의 섬세한 조각형태 그리고 건립 당시로 추정되는 단청문양이 잘 남아 있다.

 

용어해설

 

* 기단과 초석: 기단은 지면으로부터 집을 높여주는 역할을, 초석은 기둥 밑에 놓여 기둥에 전달되는 지면의 습기 차단 및 건물 하중을 지면에 효율적으로 전해줌

* 팔작지붕: 양 측면에 삼각형 모양의 합각면이 있는 지붕

* 다포(多包): 공포를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배열한 것

* 공포(栱包): 지붕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 등에 짜 맞추어 댄 구조물

* 닫집: 사찰 등에서 불상을 감싸는 작은 집이나 불상 위를 장식하는 덮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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