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의 안전 코리아] 중대재해처벌법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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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의 안전 코리아] 중대재해처벌법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
  •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 승인 2022.07.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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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안전영역에서 법치주의가 형해화(形骸化)될 위기에 놓여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피의자에 대한 '묻지 마' 압수수색은 많이 줄었지만,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법집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법 위반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교육수강을 강제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하고 최고안전책임자(CSO)가 엄연히 경영책임자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데도 법규정을 무시하고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처벌하려고 덤벼들고 있다. 대놓고 법치행정을 능멸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단체, 얼치기 전문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처벌을 산업재해 예방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산업재해가 다발하는 주범이 약한 처벌에 있다고 여기면서 처벌 강화만이 마치 유일한 답인 양 접근한다. '엄벌만능주의'가 종교화된 수준이다. 정치권과 행정기관은 이를 악용하여 엄벌을 책임 있는 대응을 회피하는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의 처벌수준이 낮은 편도 아닐뿐더러 처벌수준을 높이는 것보다 예방기준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 훨씬 정의로운 일인데도 이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이념 이전에 무지와 무책임의 소치다. 

산업재해에 대한 엄벌주의 접근은 학습역량이 부족한 자녀에게 공부할 여건 조성은 해주지 않으면서 당장 좋은 성적을 못 내면 매질하겠다고 윽박지르는 부모와 매한가지다.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전에 이 법에 규정된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위해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현재 산업현장은 부모의 겁박에 주눅 들어 공부하는 척만 하는 자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산업재해 예방에서 각 주체의 위상과 역할에 맞는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은 위상과 역할에 맞지 않게 의무가 부과돼 있다는 점에서 상식에 맞지 않는 법이다. 장소를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자에게만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고용관계에 있는 자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 자에겐 아무런 의무를 부과하지 않으면서 단지 장소적 관점으로 의무를 부과하는 이분법적 접근을 하고 있다. 가장 적합한 자에게 가장 적당한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는 안전원리를 깡그리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의무주체는 뒷짐을 지고 있어도 된다. 안전이 제대로 확보될 리가 없다. 

게다가 지배자, 운영자, 관리자가 다를 경우 누가 안전조치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지배자만 하더라도 수급인이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 소유자가 지배자인지, 점유자가 지배자인지 알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정부에 수차례 질문 했지만 아직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 자신들도 누가 의무주체인지 답변을 하지 못하면서 수범자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일러스트. 그래픽=연합뉴스

중대재해처벌법의 무작스러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간에 의무주체가 충돌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산업안전보건법에선 하청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사항을 중대재해처벌법에선 원청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만 보면 우리나라가 과연 법치주의 국가인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엉성하고 조잡한 법을 만들어 놓고 기업들에게 윽박지르기로 일관하다 보니, 대기업조차 예방보다는 '처벌 회피'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로펌이 이 혼란을 놓칠 리가 없다. 로펌이 횡재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정부가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법기술이 예방을 삼켜버리면서 안전원리가 뒤틀려지고 형식적인 안전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식의 산재예방 행정이 '가성비'가 좋을 리 없다. 지난해 사망사고가 조금 감소한 것을 놓고 마치 행정이 기여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지난 정부에서 행정인원과 예산이 대폭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감소실적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중장기적으로 사망사고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산업의 서비스화, IT기술의 발전, 자동화, 근로자의 비근로자로의 전환 경향 등이 사망사고 감소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의 영향으로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와 취약근로자가 줄어든 것도 근로자 사망사고 감소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배달종사자, 택배종사자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대폭 증가했지만 이들은 사망사고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정부의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서에는 안전원리와 법리에 맞지 않는 설명,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이 차고 넘친다. 이는 형벌권의 자의적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법 설명회를 자주 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인가. 현장에서 정작 궁금해하는 쟁점에 대해선 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자의적인 설명만 늘어놓을 거면서. 

고용노동부는 산업현장에서 안전이 어떻게 멍들고 곪아가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가. 모른다면 무지이고 알고도 방치한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모르는 건 차라리 낫다. 알고 있음을 자신하는 것이 더 섬뜩하다.  

정진우 교수는 1995년 9월 행정고시에 합격해 고용노동부에서 19년 6개월간 근무했다. 주로 산업안전보건 부서에서 근무했다.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려대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에서 안전관계법, 안전관리 등 안전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그동안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론, 산업안전관리론 등 11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 중 3권은 세종도서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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