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한이 서려 있는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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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한이 서려 있는 덕수궁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8.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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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때 경운궁으로 불리워…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이 고종황제에 내려준 칭호

 

서울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을 꼽으라면, 정동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동길은 아기자기하고, 대한제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정동은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의 코드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외국 대사관과 궁궐, 교회, 학교등 좁은 영역안에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존재하는 곳은 서울에서도 흔치 않다. 그만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온 정동의 유래와 켜켜이 쌓여 있다.

정동길은 경운궁에서 시작된다. 정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 많은 한국인들에겐 경운궁을 기억하기보다 덕수궁으로 알고 있다.

 

서울시는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대사관 직원 숙소 앞까지 이어지는 100m 구간을 보행 길로 개방한다고 30일 밝혔다. 주한 영국대사관이 자리해 60년간 끊겼던 덕수궁 돌담길 170m 중 100m 구간이 시민 품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 길은 과거 고종과 순종이 제례 의식을 행할 때 주로 이용한 길로 알려져 있다.

 

▲ 개방후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청 홈페이지

 

경운궁(慶運宮). 조선 중기 광해군때부터 경운궁으로 불리었으나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고종이 이곳에서 덕(德)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로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존호를 올리고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이라 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엔 일제의 냄새가 나고, 우리는 덕수궁이라는 이름 대신 경운궁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경운궁이 가장 큰 규모였을 때는 서쪽으로는 경향신문 까지, 북쪽으로는 조선일보, 남쪽으로는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에 까지 이르렀다. 약 4만여평의 넓이였으나, 지금은 2만평정도 되려나.... 절반 이하로 축소된 것이다.

지금의 경운궁 영역과 아울러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던 중명전(重明殿), 덕수초등학교를 아우르는 선원전(璿源殿)까지를 포함했다. 그것도 좁다 하여 러시아공사관 앞에서 雲橋(구름다리)를 내어 경희궁으로 바로 넘어 가도록 했고 남쪽으로는 시립미술관방향으로 다리를 내어 궐외각사를 삼았을 정도이니 그 규모를 짐작하겠는가? 한창때의 3/1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니 정동하면 경운궁이요, 경운궁하면 정동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 경운궁(덕수궁) /한선생 제공

 

경운궁을 본격적으로 탐사해 보자. 궁궐여행을 떠나보자!

1392년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임금께서는 백성을 내팽개치고 의주로 몽진하였다. 1년여만에 돌아오니 한양은 아수라장, 더 큰 문제는 왕이 기거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피폐한 국고로 전란후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 그래서 한양에 그나마 파괴되지 않은 변변한 곳을 찾아보니 서소문안쪽에 쓸만한 집들이 몇채 보였다. 왜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이라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는 국사교과서에서 당쟁을 논할 때 처음으로 당이 갈라진 동인과 서인 중 서인의 영수라 할 수 있는 심의겸의 집이 있었다.  당파 싸움의 원인은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지 않았는가? 서인의 영수 심의겸은 서쪽에 살고 있었고 동인의 좌장격인 김효원은 건천동(마른내길,동대문)쪽에 살고 있어서 동인과 서인이 나누인 것이다. 그  서인의 대부인 심의겸의 집과 성종의형인 월산대군의 사저등 불에 타지 않은 집들 주변에 목책을 둘러 왕의 임시 거주 장소로 삼으니 왕의 임시 처소인 貞洞 行宮이 된 것이다.

선조는 경운궁의 석어당에서 살았는데 붕어(崩御)후에 왕이 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그 후로 무려 273년이나 방치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숨막히는 권력다툼 이야기는 이 궁에서 벌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경운궁이 역사의 주무대로 등장한 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후인 1897년 2월이다.

그러면 고종은 왜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제 발로 걸어 나온 경복궁에 다시 갈수야 없어서, 이곳 정동에서 죽어가는 나라를 다시 한 번 일으키려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 정동에는 11개 나라의 각국 공사관이 있었다. 그 열강들을 배경으로 일본과 한 번 맞짱 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고종의 마음을 모르고 병신년인 1896년에 일어났다하여 “고종이 병신됐네 병신됐네”하고 놀렸다. 경운궁뒤에는 미국공사관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독일, 경향신문 맞은편의 프랑스, 그 뒤쪽에 러시아 공사관등 1882년부터 1900년 사이에 많은 외교관서가 무리지어 있었으니 정동은 그 당시 외교타운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기 이전인 1896년부터 이미 경운궁 주변의 땅을 매집하여 대대적인 궁역을 조성하였다. 인조이후 빈공간의 쇄락한 좁은 정릉동 행궁을 번듯한 공간, 왕과 수많은 신하와 궁녀들이 거하는 정궁으로 만든 것이니 백성들의 조롱을 고종은 별로 신경쓰지 않은듯하다. 아니 이곳에 와서 왕의 나라가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을 선포했으니 이곳을 정궁으로 삼아 강력한 국가의 꿈을 꾼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가 역사속에 숨어있는데..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 러시아공사관 /한선생 제공

 

그래서 이곳에는 고종의 한숨소리, 고종이 60세에 난 고명딸 덕혜옹주의 옹알거리는 소리, 이토오 히로부미와 그 친일 모리배들이 왕을 협박하는 소리들이 섞여서 녹아있다. 그 긴 한숨과 눈물이 점철(點綴)된 곳이 이곳 경운궁이니 그 역사의 현장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이제 대한문이 우리 앞에 스르르 열려진다. 슬픔의 공간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 중명전 /한선생 제공
▲ 경운궁과 궐외각사에 연결되었던 운교의모습 /한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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