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깊은 곳에서 보는 우리역사…오사카·나라·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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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깊은 곳에서 보는 우리역사…오사카·나라·교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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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대사, 한국은 근대사에서 서로의 컴플렉스 풀어야

 

2015년 여름 3박4일간 짧게 가족들과 함게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다. 오사카에 거처를 정하고 나라와 교토를 둘러봤다. 애당초 많은 것을 보겠다는 생각은 접었기에 천천히 쉬면서 중요한 곳 몇 곳만 들러보며 생각하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 오사카성 천수각. /사진=김인영

 

오사카성에서 호령하던 도요토미의 일장춘몽

 

오사카의 명물은 역시 오사카성이다.

158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일본 열도를 통일하는 거점으로 수운이 편리한 곳에 대규모 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출신이 미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후계자가 된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일본 열도를 통일했다. 그는 이전의 군주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고 야심을 품었다. 그것이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토지를 빼앗긴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을 해외로 관심을 돌리하고, 상인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동맹으로 도요토미의 꿈은 좌절됐고, 1597년 정유재란 도중에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이슬로 떨어져 이슬로 사라지는 내 신세인가. 오사카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일도 한갓 일장춘몽이었던가.”

 

▲ 오사카성 천수각에 전시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인물도. /사진=김인영

 

넓고 깊은 해자, 5층 8단의 천수각도 도요토미 가문을 지켜주지 못했다. 1615년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가 도요토미 가문을 쓰러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 '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오사카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 때의 것보다 더 큰 천수각을 세웠으나 소실됐고, 지금의 천수각은 1931년에 재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심연을 헤메는 것 같은 백제관음

 

나라(奈良)시는 도시 이름에서 친숙함이 느껴진다. 우리와 동일한 의미에 동일한 발음이 사용하는 도시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이 그곳에 국가를 수립한 후 수도이름을 ‘나라’라고 한 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나라국립박물관에서는 마침 개관 120주년 기념행사로 ‘백봉(白鳳)’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을 개최했다. 호류지등 고대에 건축된 나라 일대의 사찰에서 보존된 불상들을 전시한 행사였는데, 경주나 부여의 박물관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불상의 모습이 어쩌면 한국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보존되고 있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은 1,500년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고구려 담징이 벽화를 그린 호류지 금당. /사진=김인영

 

오사카로 돌아오는 길에 호류지(法隆寺)를 들렀다. 호류지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목조건물로,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소장돼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 절을 창건한 쇼토쿠(聖德) 태자는 고구려 승려인 혜자와 백제 승려인 혜총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배웠다. 금당 내부의 벽화는 고구려 영양왕 21년(610)에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한다. 이 벽화는 중국의 원강석불과 경주의 석굴암과 더불어 동양 3대 미술품 중 하나로 꼽힌다.

호류지에는 백제(百濟)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인들은 ‘백제’는 ‘쿠다라(くだら)’라고 읽는데, 고대 일본인들에게는 백제가 ‘큰 나라’였을테니 이 말이 변용돼 ‘쿠다라’라고 음독되고 있다는 설이 있다.

금당벽화와 함께 호류지가 자랑하는 문화재는 ‘백제관음상’이다. 아스카 시대에 조성된 이 불상은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함께 일본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높이 2.8m에 달하는 큰 키의 이 불상은 날렵한 몸매와 섬세한 손동작에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일본 평론가 가메이 가츠이치로가 ‘야마토 고사풍물기’에서 백제관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2’)

“백제관음 앞에 서는 찰라, 심연을 헤매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선율이 되살아 나왔다. 흰 불꽃이 하늘하늘 피어올라 그대로 영원 속에 응결된 듯한 모습을 접할 때 우리는 침묵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다. 그러나 망연히 서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올렸다.”

 

일왕도 고백한 백제 혈통

 

다음날 일본의 옛수도 교토(京都)를 찾았다. 도시 설계를 중국 장안을 모방해 정방형으로 구조화돼 있었다. 경주도 중국 장안을 모방했다고 하니, 한국과 일본의 두 고도의 도시구조가 비슷했다.

교토의 헤이안 신궁(平安神宮)은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직계 조상 제50대 간무(桓武)천황(781∼806 재위)의 사당으로,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이 “가장 숭배하는 조상의 터전”이라고 말한 곳이다.

일찍부터 일본 사학자들 가운데는 한일 두 나라가 한 핏줄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신궁의 주인인 간무천황 시대에 한일 양국이 동종(同種)이라는 책들을 불태운 분서(焚書)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처럼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본 왕가의 비밀을 2001년 12월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아키히토 일왕이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며 고백한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한국에서 온 이주자들이 문화와 기술을 전해준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로서는 간무(桓武)천황을 낳은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는 속일본기(續日本紀)의 기록에,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백제계 혈통이 흐른다는 간무천왕의 헤이안신궁. /사진=김인영

 

과거를 정확히 알고, 서로를 이해하는 게 중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과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여행에 앞서 읽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 서문에서 유홍준 교수는 이렇게 서술했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대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일본인들은 나라와 교토에 깔려있는 한반도 문화, 오사카의 흙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나오는 도래인의 유물을 애써 무시한다. 한국도 20기초 일본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굴욕에 치를 떤다. 그래서 서로 역사를 왜곡하고, 애써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유홍준 교수의 지적이다.

유홍준 교수의 지적이 옳다고 본다. 우리 정상의 항일 전승 70주년 행사 참석 여부로 한국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선 누구도 기피한다. 콤플렉스 때문이다.

1,500년전 머나먼 고대사의 쟁점은 사학자들의 연구와 검증에 맡길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사의 70년은 연구와 검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를 정확히 알도록 노력해 개개인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양국민간에 이해와 신뢰관계가 깊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사에 얽힌 한일 실타래는 가해자가 먼저 풀어야 한다. 우선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한발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일본을 이해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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