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벗겨낸 인디애나폴리스호 선장의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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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벗겨낸 인디애나폴리스호 선장의 누명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2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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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 맥베이는 숱한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인근 수신소에서 무시

 

미국 순양함 인디애나폴라스 호(USS Indianapolis)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원료를 싣고 태평양의 한 섬에 내려놓고 필리핀으로 가던중 일본 군함에 의해 피격돼 침몰했다. 승무원 1.196명중 316명만 구조된 이 대참사는 미국 역사에 엄청난 논란을 남긴 사건이었다.

이 군함이 72년만에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발견돼 화제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이 주도한 민간탐사팀은 해저 1만8,000피트(5,500m)에서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잔해를 확인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탐사팀을 이끄는 앨런은 "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군함을 발견함으로써 용감한 군인들에게 감사를 할 수 있되었다“면서 나머지 잔해 수색 작업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인디애나폴리스 호 /위키피디아

 

1945년 7월 약 1만톤급의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는 비밀지령을 받았다. 극비의 물자를 태평양상 사이판 인근의 티니언 섬에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물자는 원자폭탄(리틀보이)의 재료였다. 이 재료들이 결합돼 모의시험을 거쳐 8월 6일 미군 수송기에 실려 일본 히로시마 상공 600m에 투하돼 폭발했다. 일본인 10만명이 죽었다.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세계를 바꾼 죽음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7월 26일 이 전함은 극비의 물자를 티니언섬에 안전하게 하역했다. 그 다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필리핀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괌에 들렀던 전함은 28일 필리핀 레이테 해군기지로 향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하느님의 노여움일까. 그 배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이전에 적선에 의해 먼저 피격되어 침몰하는 일이 벌어졌다.

7월 30일 0시14분, 인디아나폴리스호는 일본 잠수함 I-56호가 쏜 두 발의 어뢰를 우현에 맞고 12분 만에 침몰했다. 승조원은 1,196명, 폭발직후 300여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900명에 가까운 승조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가 침몰했는데 구조대는 4일후에 왔다.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바다위에 떠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구조를 시작했고,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생존자를 건져 올렸다. 최종 생존자는 316명이었다.

600명 가까운 미 해군이 골든타임을 놓쳐 바다에 수장되었다. 생존자들이 바다 위에 떠 있었으나, 식수나 의약품이 매우 부족했다. 탈진한 승조원들은 서서히 죽어가거나 환각증세까지 보였다.

주변 해역은 상어 떼의 출몰지로, 상어들은 처음에는 시체를, 그 다음에는 주변의 부상자를 노렸다. 나중에 해군 구조기가 구조하는 도중에도 상어가 생존자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선장 찰스 B. 맥베이 3세(Charles B. McVay III)는 살아남은 승무원들을 끝까지 지휘하면서 마지막으로 구조되었다.

 

▲ 기자들에게 침몰사건 정황을 설명하는 맥베이. /위키피디아

 

구조 직후 8월 15일 일왕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 이겼지만, 책임문제가 남았다. 살아남은 선장 맥베이(대령)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맥베이는 구조된후 해군본부에 바다에 떠있는 기간에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물어보았다. 맥베이는 침몰 직후부터 구조순간까지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고, 조명탄,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다. 침몰 직후의 구조신호는 근처의 미 해군 통신 중계소가 감지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서 자고 있었고 다른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노느라 신호자체를 무시했다. 다른 수신소는 일본 해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 구조신호 자체를 무시했다. 앞서 일어난 미국판 세월호 사건이나 다름없다.

맥베이는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해군본부는 맥베이 선장에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 선장이 순항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함대로부터 공격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순항할 때 전함은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하는데, 맥베이가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 적이 공격하는데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조항도 집어 넣었다.

2차 대전에서 침몰한 미군 전함은 380척이나 된다. 그중 유일하게 군사재판에 회부된 선장이 맥베이였다. 맥베이는 간신히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사면령으로 복직을 했다. 1949년 그는 소장 계급으로 군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1968년 11월 6일 그는 커네티컷주 자신의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는 죽으면서 어린시절에 선물받은 장남감 선원을 안고 있었다. 그는 전역후 죽은 승무원 가족들로부터 비난과 항의가 섞인 전화와 편지를 숱하게 받았다. 그의 부인이 암으로 사망한 직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묻혔던 맥베이의 진실은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헌터 스콧(Hunter Scott)이라는 11살 소년이 있었다. 그는 영화 『조스』를 좋아했다. 1975년작 영화 조스의 주인공 로버트 쇼는 구조된 인디애나폴리스 호 승조원 출신으로 되어 있다.

이 어린 소년은 어느 이벤트에 자신의 연구물을 제출하기 위해 조스의 배경이었던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자료를 모았다. 그런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인디애니폴리스호의 생존자 150명 가량을 대상으로 인터뷰해서 자료를 모았다.

이 과정에서 스콧은 맥베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맥베이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탄원 운동을 벌였고,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1999년 존 워너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이 이와 관련한 결의안을 상정했다.

그때 위원회에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인디애나폴리스호를 격침시킨 일본 I-58 잠수함의 함장 하시모토 모리츠라(橋本以行) 중좌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서 하시모토는 이렇게 썼다.

 

▲ 하시모토 모리츠라/위키피디아

"저는 귀하의 결의안이 1945년 7월 30일 격침된 미해군 중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고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어뢰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인으로서 저는 맥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전 인디애나폴리스가 어떤 상태라도 격침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인디애나폴리스의 승조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맥베이 대령에게 씌우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맥베이 제독을 복권시키고, 그를 포함한 316명의 생존자들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살아남은 승조원들은 맥베이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인디아나폴리스 침몰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의 재로를 실었다는 점, 미국 해군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피격사건이라는 점, 해군 지도부에 의해 선장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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