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에 다시 제작된 덕종어보 “모조품 아니다”
상태바
1924년에 다시 제작된 덕종어보 “모조품 아니다”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8.18 1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짝퉁 논란에 문화재청 “재제작 어보, 조선왕실에서 공식 인정”

 

조선 왕실이 잃어버린 어보(御寶)를 다시 제작할 경우, 이를 짝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18일 이 문제가 느닷 없이 불거졌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은 19일부터 10월 29일까지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이 특별전에는 지난 7월 한·미 정상회담 때 반환받은 문정왕후어보 어보와 현종 어보를 국민에게 처음으로 공개함과 동시에 2014년 해외에서 환수해 온 유서지보, 준명지보, 황제지보 등의 국새와 고종 어보 등 조선 왕실 인장 9점, 2015년에 반환된 덕종어보 등을 함께 전시할 계획이다.

이에 CBS노컷뉴스가 “문화재청이 조선왕실의 유물인 덕종어보가 모조품인 것을 뒤늦게 파악한 것도 모자라, 다른 지정문화재들과 같은 급으로 묶어 특별전시를 강행하려 한다”는 기사를 냈다. 노컷뉴스는 이어 "해당 어보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왕실 예식과장으로 재직하며 주도해 만든 것이라는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덕종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아버지다. 원래의 덕종어보는 성종이 죽은 아버지를 기려 1471년에 제작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4년 종묘에 절도 사건이 발생해 덕종 어보, 예종 어보 등 5점이 사라졌다. 그중 덕종어보는 2015년에 해외에서 환수했다.

그런데 1924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분실된 어보에 대해 순종이 염려해 경찰서장을 불러 조사를 촉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순종이 덕종어보등 잃어버린 어보를 다시 제작하라는 지시를 내린 기사가 나왔다.

문화재청이 덕종어보를 환수하기 직전까지는 원본인지, 재제작품인지를 몰랐다고 인정했다. 환수할때까지 표면성분분석등 과학적 조사를 할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수후 과학적 조사를 한 결과 조선시대와 성분 재료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환수된 덕종어보가 1924년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완용의 아들이 제재작에 참여했다는 보도에 대해 문화재청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당시 종묘의 관리자로서 분실의 책임을 지고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보도(매일신보)로 보아 이항구가 만든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아울러 문화재청은 조선 왕실이 다시 제작한 어보를 종묘에 봉안했기 때문에 모조품이 아니며, 왕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어보라고 밝혔다. 예켄데 명종 8년에 경복궁 화재로 훼손된 인성왕후 및 문정왕후 어보가 다시 제작된 경우도 있다는 것.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에서 환수한 문정왕후 어보도 재제작된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2015년 반환 당시에 1471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공개했고, 조사후 재제작 사실을 알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채 공개행사를 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다.

 

▲ 문정왕후 어보(앞) 현종어보(뒤) /문화재청

 

어보(御寶)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 때 사용하던,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을 말한다. 국새(國璽)는 임금의 도장으로, 외교문서나 행정에 사용했고, 어보는 의례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어보는 각종 행정문서가 아닌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에서 시호ㆍ존호ㆍ휘호를 올릴 때 제작되어 일종의 상징물로 보관하던 것이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고, 왕과 왕비의 어보는 사후 왕실 사당인 종묘에 안치했다.

어보는 거북 또는 용 모양의 의례용 도장, 도장을 담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을 담는 보록(寶盝), 그리고 이를 각각 싸는 보자기와 보자기를 묶는 끈 등 최소 6개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한 묶음으로 구성돼 있다. 어보는 3~7kg 정도의 무게로 한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운 편이다

 

▲ 현종어보(왼쪽), 문정왕후 어보(오른쪽)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서 조선왕실 어보 특별전…8.19.~10.29.

 

한편 고궁박물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한·미 정상회담 때 환수한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를 이번 특별전에 첫 공개한다. 두 어보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 문정왕후 어보 /문화재청

 

① 문정왕후 어보(文定王后 上尊號 金寶)

조선, 1547년(명종 2) 처음 제작, 1554년(명종 9) 재제작

동에 도금, 2017년 환수

 

중종(1488~1544년, 재위 1506~1544년)의 계비 문정왕후(1501~1565년)의 어보이다. 보면(譜面)에 ‘성렬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를 구첩전(九疊篆, 글자의 획을 여러 번 구부려 쓴 서체)의 서체로 새겼다. ‘성렬’은 문정왕후가 대왕대비였던 1547년 1월 26일에 올린 첫 번째 존호이다. 같은 해 9월 21일 ‘인명(仁明)’이라는 두 번째 존호를 올릴 때 만들었던 어보를 포함하여 문정왕후의 보, 옥책, 교명 등이 1553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이듬해인 1554년에 다시 만들었다는 기록이 『명조실록』에 전한다. 환수된 어보는 이 때 다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질은 동에 금도금을 하였고 손잡이는 거북모양[귀뉴龜紐]이며, 거북의 배 밑으로 꿰었던 매듭 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문정왕후의 어보는 모두 3과顆로 상존호, 가상존호, 상시호 금보이며 종묘 종전 제6실 중종실에 봉안되었다. 함께 제작했던 옥책은 전하지 않는데, 1705년(숙종 31) ~ 1789(정조 13)에 작성된 『종묘등록宗廟謄錄』에 “금무今無”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잦은 화재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이미 분식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현종어보 /문화재청

 

② 현종어보(顯宗 王世子冊封 玉印)

조선, 1651(효종 2)

옥, 2017년 환수

 

1651년(효종 2) 조선 18대 왕 현종顯宗(1641~1674년, 재위 1659~1674년)을 왕세자에 책복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왕세자 책봉 시 인면印面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 네 글자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현종어보에는 ‘왕세자지인王世子之印’이라는 다섯 글자를 구첩전의 서체로 새겼다. 『[현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에 “왕세자책봉 옥인의 전문은 왕세자지인 다섯 글자를 전각하였다”는 내용과 현종어보의 도설이 실려 있다.

재질은 옥玉이고 손잡이는 거북 모양[龜紐귀뉴]이며 붉은 매듭 끈이 달려있다. 현종의 보인寶印은 왕세손 책봉 때와 왕세자 책봉 때, 그리고 존호와 시호를 올릴 때 제작하여 모두 4과가 종묘 정전의 현종실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모두 분실되어 한 과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번에 환수된 현종어보는 현전하는 유일한 것이다. 책봉 시 어보와 함께 만들었던 죽책竹冊, 교명敎命은 유출되지 않고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보의 귀환으로 현종 세자 책봉 시 책보冊寶 일습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