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제국주의③] 침략 도구가 된 살인병기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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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제국주의③] 침략 도구가 된 살인병기 기관총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1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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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장식 총기로 무장한 유럽인들, 아프리카 부족사냥에 나서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 이 영국인은 19세기말 아프리카에서 실종된 또다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조우하고 나일강의 수원인 빅토리아호를 발견한 대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에게 스탠리는 대학살자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1877~78년 그는 아프리카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며 빅토리아호 기슭에 있던 마을 붐비레의 주민들과 싸우게 된다. 일단 그의 일행은 도망을 쳤다. 원주민들은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스탠리는 몇 달뒤 다시 돌아와 코끼리를 사냥하는 총으로 250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당시 아프리카에 주재하던 영국 영사는 이 사건에 대해 “한번도 총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원주민들에게 현대식 무기를 무모하게 사용한 사건, 아프리카 발견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 영국의 탐험가 헨리 스탠리 경 /위키피디아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키니네의 효력이 알려지면서 아프리카의 진입장벽이 해제되자, 무협심에 가득찬 유럽의 탐험가들이 너나할 것 없이 아프리카 탐험에 뛰어들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유럽인들의 존경을 받는 스탠리였다.

스탠리는 콩고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원주민들을 만났다. 스탠리의 일행은 윈체스터 총이나 스나이더 총을 쏘면서 적을 쫓았다. 스탠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들의 마을까지 쫓아들어갔다. 마을의 거리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숲속으로 쫓고 상아로 만든 신전을 부서뜨리고, 오두막은 불사지르고, 카누는 물 한복판에 끌고가 떠내려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탐험이 아니었다. 전쟁도 아니었다. 유럽의 탐험대는 현대식 총으로 무장한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스탠리는 마지막 여행인 1886~88년 이집트 남쪽의 수단 지역으로 파견나간 에민 파샤를 구출하러 갔다. 탐험대는 510정의 레밍턴 라이플과 10만발의 탄약, 50정의 윈체스터 기관총, 5만개의 탄창을 가지고 떠났다. 탐험대가 아니라 침략군이었다. 이때 스탠리는 미국인 하이람 맥심이 발명한 맥심기관총 한정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에민 파샤를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영국은 수단을 자기네 영역이라고 우겼다. 스탠리는 영국으로 귀국해 아프리카에 관한 위대한 업적과 용기, 저술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는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총기혁명의 시대를 맞았다.

서국 제국주의는 식민화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무기와 기술의 역사이기도 했다. 현지 토착인들은 유럽 침략자보다 수가 많았고, 지형지물에 대한 이점을 알고 있었다. 유럽 식민자들의 입장에서는 본국의 지원이 늘상 부족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유럽인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세계를 제패한 힘은 바로 무기에 있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유럽인들의 무기는 머스킷(Musket) 총이었다. 이 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유하고 있던 조총에서 약간 진화한 수준이었다. 일종의 화승총으로 불을 붙여 점화시키는 점에서 조총과 같다. 화약을 총구에서 밀어 넣어야 하고, 부싯돌로 불을 붙여 발화시켰다. 따라서 사격후 다시 사격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1분 이상이 걸렸다. 발화가 잘 되지 않아 최고의 조건에서도 10발중 7발만 발화되었고, 비가 오거나 습한 날에는 발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탄약을 장전하려면 총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들키기 쉬운 약점이 있었다.

이런 머스킷 총의 약점 때문에 백인 군인들이 활로 대항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패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노예상인에게 맞섰다는 일도 발생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제국주의자들은 총기 개발에 적극 나섰다. 기계와 화학공업이 발전한 덕도 보았다.

격발 뇌관이 발명되면서 불발탄의 비율을 급격히 감소시켰고, 폭약을 금속통에 넣는 기술이 나오면서 비오는 날에도 장전이 가능해졌다. 총신에 나선형 홈을 파 탄환의 정확도가 높아졌다.

총기 발전에 중대한 계기는 후장식 혁명이었다. 이전까지의 총기는 전장식(前裝式)이었다. 탄약을 총구에서 밀어 넣고 꼬질대로 다진 뒤에 탄환을 넣고 격발시키는 방식이었다. 한번 쏘면 다시 장전하는데 1분이상이 걸렸고, 그 사이에 적군이 돌격해 전투는 백병전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후장식(後裝式)은 총 뒷부분의 약실을 열어 삽탄하고 격발시키는 방식이었다. 격발후 다시 격발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사수가 삽탄하기 위해 굳이 일어서지 않아도 되었다.

후장식 총의 발명은 무기 역사에서 가히 혁명이라 할만 했다.

그 대표적인 승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이었다. 비스마르크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은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가 개발한 후장식 총으로 무장했다. 이 총의 장점은 장전 속도였다. 전장식 총을 보유한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서서 장전하고 발사후 장전하는데 몇 분이 걸렸다. 이에 비해 후장식 총을 가진 프로이센 군은 무릎을 꿇거나 누워서 탄약을 장전했고, 오스트리아 병사보다 7배 빠르게 장전할수 있었다. 자도바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이로써 독일은 통일했다. 독일 통일은 어쩌면 우월한 후장식 총기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

 

▲ 스위스의 맥심 기관총. 1894년. 7.5mm 구경. /위키피디아

 

이후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화약이 개발되었고, 드디어 다발의 사격이 가능한 기관총이 등장했다. 첫 기관총은 미국 남북전쟁 때 나온 개틀링 기관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전에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며 신뢰를 얻은 기관총은 맥심 기관총이었다. 1883년 하이람 맥심(Hiram Maxim)이라는 미국인이 발명했다.

이 기관총은 발화된 화약의 에너지로 탄환을 자동으로 장전할수 있기 때문에 크랭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보병이 휴대할 정도로 가볍고, 크기도 최소화해 적의 눈에 띠지 않게 장치할수 있었다. 이 기관총은 1초에 11발의 탄환을 뿜어냈다. 머스킷 총에 비해 700배 이상의 장전 속도를 냈다.

후장식 총기와 맥심 기관총의 수혜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유럽의 침략 군대였다. 기관총은 종전의 총기류에 비해 장거리 아동과 열대지방의 기후를 잘 이겨냈다. 무게도 종전의 것에 비해 3분의1이었으므로, 밀림에서 총을 나를 짐꾼도 3분의1로 줄일수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이 30년의 짧은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등 유럽 열강에 식민화된 것은 바로 이 기관총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왕국과 토착인들에겐 전쟁이었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럽인들에겐 사냥이었다.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 아프리카 아샨티 왕국을 침공하는 영국군 /위키피디아

 

현재 아프리카 가나의 삼림지대에 아샨티(ashanti)라는 오래되고, 강력한 왕국이 있었다. 1873~74년 영국은 6,500명의 병력으로 이 왕국을 정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심 기관총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샨티 왕국은 대량학살에 가까울 정도의 피를 흘리고 나라를 넘겨줬다.

기관총이 나오면서 침략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부족 사냥에 나섰다. 1891년 프랑스군 300명은 아프리카 서해안 포르토노보(Porto-Novo)에서 두시간 반 동안 2만5,000발의 탄환으로 폰족 군대를 패배시켰고, 1897년 유럽인 32명, 아프리카인 507명으로 구성된 병력이 나이지리아 누베족 3만1,000명의 병력과 싸워 이겼다. 1899년 차드에서는 300명이 식민군이 1만2,000명의 현지 병력과 대항해 승리했다.

영국의 키치너 장군은 1898년 수단 전투에서 적병 4만명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망자는 영국군 20명, 영국을 도운 이집트군 20명, 영국과 싸운 데르비시 토착민은 1만1,000명이었다. 일방적인 전투였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회고했다.

“맥심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라이플은 빠르게 총알을 발사했다.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효과는 엄청났다. 물결을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 무서운 기계. 그 아름다운 악마는 포연에 감싸였다. 다가오는 수천명의 적군들로 붐볐던 케레라 언덕은 파괴되어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바위는 모래가루가 되었다. 공격하던 메르비시들은 넘어져 서로 몸이 얽히고 더미들이 되었다.”

유럽 열강들은 현대화한 살인무기를 발명함으로써 놀라울 정도로 적은 비용으로, 빠른 시간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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