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조부도 이민 못 왔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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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조부도 이민 못 왔을 것”
  • 황헌
  • 승인 2017.08.0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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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황헌 앵커]

한 주일의 뉴스를 마치면서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끝맺음을 할까 고심하다 문득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가 ‘트럼프의 새 이민 정책을 적용하면 트럼프의 할아버지도 영어가 약해 이민 올 수 없었을 것’이라 비아냥댄 기사를 접해서 바로 그 내용으로 끝말을 작성했다.

“미국에 이민 올 때 영어에 능통해야 가산점을 준다는 새 이민정책, 논란이 뜨겁습니다. 이민자를 포용하는 시(詩)가 적힌 뉴욕 자유의 여신상도 논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자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영어를 못 한 트럼프 대통령의 할아버지도 이민 올 수 없었을 거’라고 비꼬았습니다. 금요일 <뉴스의 광장>을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새 이민정책이 발표됐다. 큰 목표는 1년에 100만 명에 이르는 영주권(그린 카드) 발급을 10년 안에 50만 명으로 줄인다는 거다. 그간 미국 영주권이 있는 가족의 초청을 받으면 영주권을 어렵지 않게 받아왔다. 이른바 ‘초청 이민’인데, 그걸 크게 줄인다는 것. 기존엔 영주권자의 형제나 자매, 성인 자녀에게도 신청만 하면 영주권 발급이 허용됐다. 트럼프는 그 대상을 확 줄였다. 형제, 자매, 성인 자녀는 불가능하게 고쳤다. 오직 배우자나 미성년 자녀에게만 영주권 취득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 1년 평균 14만 명에 이르는 취업이민 그린카드 발급 조건을 까다롭게 고쳤다. 학력과 기술, 영어 능력 등을 두루 평가한다는 것. 종전엔 신청자의 학력이나 영어 능력과는 무관하게 기술이 있으면 취업이 되었고 일자리를 얻어 급여를 받기 시작하면 일정 기간 후 그린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영어 능력이 지금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어제 백악관 관리와 기자가 나눈 설전은 자못 흥미롭다. 관리는 스티븐 밀러 백악관 수석 정책 고문이었고 그와 뜨겁게 말싸움을 벌인 기자는 쿠바 출신 이민자 2세인 CNN의 짐 아코스타 기자였다. 영어 구사 능력 떨어지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새 정책을 두고서 벌인 설전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에는 ‘자유를 바라는 그대여, 가난에 찌들어 지친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라고 쓰여 있다. 새 이민법은 이런 미국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 아니오?” (기자)

“그 시구는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나중에 가져다 붙인 것이오.” (관리)

“영어 능력을 평가해 이민을 뽑는다면 영국과 호주 출신만 데려오지 그래요?” (기자)

“영국이나 호주 출신만 영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그 편견이 놀라울 따름이오.” (관리)

 

<워싱턴포스트>는 독일계 이민자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조부 프리드리히 트럼프의 이민 기록을 추적해서 기사를 실었다. 언어 구사 여부를 묻는 질문에 ‘none’이라는 답이 고스란히 기록에 남아 있다고 신문은 밝혔다. 16살에 미국으로 온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트럼프가 미국에 올 당시만 해도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트럼프의 새 이민정책에 대한 논란은 갑질에 대한 저항과도 맥이 닿아 있다. 취업 이민의 경우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학력과 영어 능력을 평가한다는 항목이 추가되었기 때문. 한마디로 배운 것 없고 영어가 짧은 이에게는 희망의 나라 어메리카로 가려는 엄두조차 내지 말라는 것인 셈이다.

 

미국의 이민 역사는 크게 4번의 흐름으로 점철되었다.

1607년부터 1820년까지의 1차 흐름은 주로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에서 오는 이민의 시기였다. 이어 1870년대까지의 2차엔 아일랜드와 독일인들의 이주가 주를 이뤘다. 뒤이어 1880년부터 1920년대까지의 3차 흐름은 이탈리아, 폴란드, 그리스 등 남유럽과 동유럽 사람들이 주로 몰려 온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이후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4차 시기엔 멕시코 등 중남미와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민들이 대거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발을 내디딘 흐름이었다.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다. 영국의 앵글로 색슨 백인들만 이민을 받던 때도 있었다. 1868년 미국헌법이 14번째 수정이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 혹은 귀화자들은 미국의 시민”이라는 규정이 생겼다. 미국의 ‘속지주의 원칙’의 근거가 된 개정이었다. 1882년엔 하도 중국인들의 이민자 규모가 급증하다 보니 아예 중국인만 이민에서 금지하는 ‘중국인 이민 제한법(Chinese Exclusion Act)’까지 제정될 정도였다. 1917년 아시아와 태평양 여러 섬나라 출신의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영어 능력을 필수 요건으로 규정한 적도 있었다.(코넬대 이현옥 박사의 <미국이민정책> 자료 참고)

그러니까 1917년 영어능력 구사를 이민 자격의 요소로 올린 지 꼭 100년 만에 트럼프가 이번에 또 다시 같은 제한을 넣어서 이민법을 새로 만든 것이다.

 

필자는 지난 6월 뉴욕을 집중 탐구한 적이 있다. 그때 ‘자유의 여신상’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스티븐 밀러 백악관 정책 고문이 말한 것처럼 가난하고 지친 자들을 환영하는 내용의 시가 자유의 여신상에 처음부터 새겨져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를 추구하는 뉴욕의 상징물이 되었다. 미국 독립이 1776년이었고 프랑스는 그 100년을 기리는 뜻에서 조각가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로 하여금 동상을 만들게 했다.

여신상이 뉴욕에 온 지 7년만인 1903년 유대인 이민자 후손인 엠마 라자루스가 쓴 시가 동상 받침대 동판에 새겨졌다. 이후 지난 100년 넘게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 항구에 첫발을 내디딘 피폐한 이민자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 시의 제목은 ‘새로운 거상(The New Colossus)’이다. 맨 마지막 부분이 바로 이민자를 포용하는 내용으로 널리 회자되는 표현이다.

 

Give me your tired, your poor, your huddled masses yearning to breathe free, the wretched refuse of your teeming shore. Send these, the homeless, tempest tossed to me, I lift my lamp beside the golden door!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해안가의 찢어진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소서. 집 없고 폭풍우에 지친 이들을 내게 보내주소서. 나 황금의 문 곁에서 등불을 올리겠소.)

 

트럼프는 지금 여러 가지 기록을 수립하고 있는 중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단기간에 지지도 30% 이하로 추락하는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역대 취임 후 최단 기간에 하원에서 탄핵안이 발의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G20 정상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동시에 배척당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민자에 의해 건국되고 성장한 나라가 미국이 공연 중인 이 블랙 코미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세계인들은 지켜보고 있다.

 

▲ 황헌 앵커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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