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속이론⑧] 칠레의 자본통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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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속이론⑧] 칠레의 자본통제 모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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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출구를 막으면 입구로 들어오는 자본도 없다는 선례

 

눈 덥힌 안데스 산맥을 넘어 나타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뿌연 매연에 싸여 흐릿했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분지에 도시가 형성됐기 때문에 공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태평양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매연을 날려보내기 전에는 이 유럽풍의 아늑한 도시는 늘상 매케한 매연에 휩싸여 있다.

산티아고에 탁한 공기를 고이게 한 안데스 산맥처럼 칠레는 오랫동안 국경에 담을 쌓고 국제 자본의 이동을 제한해왔다. 금융 위기에 처한 아시아에서는 칠레의 자본 통제(Capital Control)를 배워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실제 이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이 자본통제를 강화하는 동안에 정작 모델이 됐던 칠레는 오히려 자본 통제를 해제했다. 외국 자본이 유입되지 않아 기업의 금융부담이 커지고,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 통제는 스스로의 한계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순을 내재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자본 통제

 

‘엔카헤(encaje)’라고 불리는 칠레의 자본 통제의 골격은 두 가지였다.

첫째, 칠레에 들어오는 외국 자본은 1년 동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둘째, 외국인 투자자들은 직접투자 금액의 30%를 이자 없이 은행에 예치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예치해야 할 금액의 3%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한마디로 장기 자본만 허용하되, 주식시장이나 채권, 외환 시장에서 단기 이익을 내기 위해 유입되는 핫머니선 자본은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칠레의 자본 통제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출발, 세계 경제 침체로 이어지는 1998년의 대불황의 여파를 막는 방파제가 되지 못했다. 수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구리 생산량이 격감했다. 아시아 수요가 줄어든데다 가격마저 하락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칠레는 1998년 6월 금과옥조처럼 여겨오던 자본 규제를 완화했다. 외국인 직접투자 자금의 무수익 예치비율을 30%에서 10%로 낮추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칠레의 주식시장과 채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외환 부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문턱을 대폭 낮췄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여전히 제한이 있는 안데스 산맥을 넘길 꺼려했다.

4개월 후인 10월 칠레 정부는 그나마 자본 통제의 명분으로 남겨 두었던 10%의 무수익 예치비율을 완전 해제했다. 단기 자본, 즉 핫머니의 유입을 차단하다간 도도히 흐르는 국제조류에 더 이상 홀로 서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중앙은행의 카를로스 마사드 총재는 “자본 통제가 더 이상 해결책은 아니다”며 “자본 통제가 국내외 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자인했다.

 

▲ 1976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대통령. /위키피디아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경험한 나라

 

한때 사회주의 국가였던 칠레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의 우익 쿠데타로 자본주의 경제로 돌아섰다.

우익 군사정부는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면서 처음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정권과 독점자본가가 결탁한 국가주의적 자본주의 경향을 선택했다. 칠레 정부는 수입 제품에 높은 관세를 물려 국내 기업을 보호했지만, 경쟁력은 낙후했다. 기업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았고, 노동자들의 직장이 보장됐고, 노조의 힘이 강력했다. 사회주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국가의 의료보험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 당연히 경제는 비효율적으로 움직였고, 침체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정치세력과 기업주는 하나의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 권력과 부를 나눠먹었다.

칠레도 1982년과 83년에 통화 폭락의 위기를 맞았다. 은행 경영자들은 부동산 투기에 돈을 물씬 빌려줬고, 권력과 결탁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개발도상국의 전형적인 금융관행이다. 당시 칠레 페소화는 90%나 폭락했다.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은행이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피노체트 장군은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자유시장 이론의 원조인 밀튼 프리드먼 교수에게서 공부한 ‘시카고 보이’들을 불렀다. 당시까지 독재정권에 협력하지 않았던 미국파 경제학자들은 피노체트가 시장 경제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마음을 돌려 권력에 참여했다.

1980년대부터 속속 권력에 참여한 시카고 보이들은 은행 개혁을 단행했다. 부실 은행을 폐쇄하고, 은행의 부실 채권을 정부 예산으로 구제해주었다. 80년대말 미국이 저축대부조합(S&L)을 구제할 때의 방식을 칠레는 일찌감치 사용했던 것이다.

칠레 내각의 시카고 보이들은 86년 대대적인 금융개혁을 단행했다. 그들은 은행 대출에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은행에 대한 현장 감사를 강화하는 등 강력한 은행을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산업분야의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자유시장 정책을 시행했다.

칠레의 시장 자유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선도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반미주의, 종속이론이 판을 칠 때 칠레는 시장 경제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칠레는 1985년에서 96년 사이에 연평균 5% 이상의 1인당 실질소득 증가율을 달성, 남미국가 중에서 가장 앞섰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남미 국가들 중에서 빈부 격차가 덜한 나라에 속한다.

시카고 보이들은 프리드먼 교수의 가르침의 정반대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그것이 자본 통제였다. 1991년 그들은 자본 통제를 위한 잇따른 조치를 시행, 외국 자본의 유입에 관해서는 철저히 규제했다.

칠레의 자본통제는 국민들의 높은 저축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칠레의 저축률은 당시 28%로 같은 남미 국가인 브라질의 18%보다 훨씬 높았다.

통화위기를 겪은 한국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단기 차익을 노리는 외국 자본의 이탈을 막기 위해 칠레의 경우가 거론됐으나, 칠레의 자본 통제는 반드시 효과를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칠레가 아시아와 같은 금융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금융 개혁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칠레의 외국 자본 통제가 몇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첫째 외국 자본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 통화가 과대평가 되는 것을 방지했다. 따라서 외환 부족시 통화가치가 급격히 추락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둘째 외국 자본 유입이 억제됨에 따라 국내에 고금리를 유지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이 억제됐고, 셋째 파국적인 금융시장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 통제는 칠레 경제에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저리의 외국 자본이 유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의 금융 부담이 커지고,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킬 소지가 있었다.

엔카헤 정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를 심화시켰다. 해외 자본에 대한 과중한 세금 부과는 중소기업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나마 외국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대기업은 경쟁력을 가졌지만, 중소기업은 고금리에 허덕여야 했다. 또 대기업은 해외에서 장기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지만, 중소기업들은 신용이 부족하므로 단기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 정부는 단기채 발행이 외국 단기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는 것이므로 이를 막았다. 중소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금리에 허덕여야 했다.

또 국내 금리가 높아지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외국 차관에 세금을 물리면 당연히 채무에 대한 이자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98년 현재 외국 자본 유입이 자유로운 아헨티나의 시중 금리는 8.5%인데 비해 칠레는 15.3%에 이르렀다.

칠레의 자본 통제는 한계를 드러냈고, 스스로 이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될 모순을 안고 있었다. 칠레 카톨릭 대학의 살바도르 발데스 교수는 “자본 통제는 실패작”이라며 “오히려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해쳤다”고 비판했다.

칠레 정부가 자본 통제를 허물자 국제자본이 안데스 국가에 밀려들었다. 99년엔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고, 국영 기업 매각에 미국등 해외자본의 참여가 치열했다. 그러나 칠레 자본 시장도 핫머니의 공격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말레이시아 자본 통제와의 비교

 

1997년 9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산티아고를 방문, 칠레의 자본 통제에 매혹됐다. 서방 자본에 대항하던 마하티라는 1년후 전격적으로 자본 통제를 실시했다. 마하티르 정부는 말레이시아에 투자된 단기 자본은 1년 이내에 빠져나갈수 없으며, 외환 거래를 전면 금지하되, 환율을 1달러당 3.80 링기트로 고정시켰다.

마하티르의 자본 통제는 말레이시아 경제를 안으로 곪게 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말레이시아를 기피했고, 해외에서 링기트화는 전혀 가치를 갖지 못했다.

칠레는 해외 단기자본의 과잉 유입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이에 비해 말레이시아에선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생겨날 공백을 막기 위해 취해졌다. 칠레의 조치는 밀물을 막기 위한 제방이라며, 말레이시아의 그것은 썰물을 막기 위한 댐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는 이미 유입된 단기 외채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하티르는 1999년 10월에 자본 통제를 해제하면서 이웃 아시아국과 같은 경제파국을 피할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그는 이웃 나라들이 경제 개혁을 단행할 때 쇄국 정책을 취함으로써 글로벌 경제의 흐름에 낙후한 정치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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