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비밀정원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서울 종로구 창의문(자하문) 일대는 박정희 정권 때 쳐놓은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로 인해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집이 허물어져도 고치지 못했고, 빈 땅이 있어도 새 집을 짓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에 강원도 어느 산간마을과 같은 오지 마을이 형성돼 있다.
그 규제가 수십년 지나 도시인들에게 큰 복으로 돌아왔다. 도심 한가운데 산촌 마을의 깨끗한 자연을 맛볼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게 신기하다. 바로 백사실 계곡이다. 행정구역은 종로구 부암동.
백사(白沙)는 조선 중기의 문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호다. 우리에겐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름이다. ‘오성(鰲城)’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漢陰)’은 한원부원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다.
이항복의 별장 터가 이 곳에 있었다고 추정되면서 예로부터 이 계곡을 ‘백사실 계곡’이라고 불렀다. 인공적으로 꾸며 놓은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정자의 기둥으로 사용되었을 주춧돌이 땅에 박혀 있다. 주춧돌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보면 작은 한옥 한 채가 그려진다. 옛사람들은 이 곳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불렀다. ‘백석’은 ‘백악(白岳)’ 즉 ‘북악산’을 말한다. 그러니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란 뜻이다. 경치좋은 곳에 지정하는 명승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항복은 해학과 기지가 뛰어난 인물이다. 그래서 어린이용 책자에 ‘오성과 한음’을 짝지어 소개된다.
그의 장인은 임진왜란때 도원수 권율(權慄)이었다. 이항복이 어렸을 때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 가지가 이웃 권율 대감집으로 휘어지자, 권율은 자기네 것이라며 감을 따먹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권율의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그럼 이 주먹은 누구 것입니까” 추궁했고, 결국 권율에게서 미안하다는 승복을 얻어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는 알수 없지만 권율은 그에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친구인 한음 이덕형과의 우정에서 나온 우스갯소리도 있다. 어느날, 이항복이 전염병으로 몰살한 일가족의 염습을 이덕형에게서 부탁받고 혼자 그 집에 갔는데, 갑자기 시체가 일어나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다. 알고보니 이덕형의 장난이었다.
이항복은 이런 기지와 해학이 있었기에 풍류를 즐길줄 알았고, 이 백석계곡에 정자를 지어 벗들과 정담을 나눌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 백사실 계곡에 도룡뇽과 맹꽁이들이 집단서식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만큼 청정계곡인 것이다.
이 곳을 가는 길은 쉽다. 세검정에서 올라오는 방법과 부암동에서 가는 길이 있다.
세검정에서 세검정 성당을 지나면 작은 야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야산에 비밀 정원이 숨어 있다. 조금 지나면 부처바위(佛岩)가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땅 속에 뭍혀 있던 것을 주민들이 꺼내 세워둔 것이라 한다. 부처 바위를 지나 골목길을 따라 100여m를 가면 작은 폭포가 나온다. 그 골목을 오르면 현통사라는 절이 나오고 곧이어 백사실 계곡을 볼수 있다.
부암동에서 가는 길도 아기자기하다. 가벼운 오르막길을 산책삼아 가다보면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배경이 된 ‘산모퉁이’라는 커피숍이 나온다. 거의 정상 부근이라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암동 풍경이 넉넉하다.
그곳에서 커피 한잔하고 내려가면 백사실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쩌든 도시 생활을 피해 잠시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걷기 좋은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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