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속이론⑦] 모델이 된 멕시코 금융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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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속이론⑦] 모델이 된 멕시코 금융개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2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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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요구대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빠른 속도로 경제 회복

 

페소화 폭락으로 금융위기가 닥쳐오자, 멕시코의 에르네스트 세디요(Ernesto Zedillo) 정부는 강요에 의해서건, 자발적이건, 긴축 정책을 선택하고 각 부분에서 허리를 졸라매고 경제 재건에 나섰다. 만일 세디요 정부가 채권단에 저항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IMF에 저항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가를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보자.

혼미를 거듭하던 멕시코 경제는 1995년 2월 미국이 2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IMF도 구제 금융패키지를 준비하자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3월 10일 세디요 대통령은 신경제정책을 발표, 공공지출 삭감, 엄격한 통화관리, 물가 및 세금 인상 등을 내걸었다.

이러한 조치는 응급 조치에 불과했다. 세디요 정부는 5월 국가계발 계획을 발표, 2000년까지 실행되는 6년간의 장기청사진을 제시했다. 물론 IMF의 요구사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내세운 계획이었다. ▲과감한 세제 및 금융개혁 ▲제조업, 농업, 광업, 관광업등 4대 산업 육성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등을 통해 연간 5% 대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조치에 대해 멕시코 재무부 대변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장 결실을 얻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열매를 거둔다는 심정으로 개혁의 씨를 심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는 조치도 있지만,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개혁 조치의 골자는 경쟁제도의 도입과 국영 기업의 민영화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가 가지고 있는 알짜기업을 해외에 매각, 부족한 외화를 유치하며, 국내 경제제도를 미국식 개방 경제로 이끌겠다는 뜻이다. 석유화학 철도 광산 항만시설등 공기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해 나갔으며 통신분야의 구제가 철폐됐다. 은행과 기업들이 더 이상 내수 시장의 독점에 안주할 수 없는 여건이 됐다.

노동자들도 더 이상 자기 주장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1995년 10월에는 기업, 노조, 농민 대표들로 노사정 협의회가 구성됐다. 노사정 협의회는 ‘경제 회생 방안’을 마련,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협의회는 매주 수요일 경제대책 협의를 통해 모든 경제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하오 5시에 시작된 회의는 첨예한 대립으로 새벽에 타결되기도 했다. 노사정 합의에 따라 국민들도 경제 안정화 정책에 적극 협력, 소비 지출이 크게 감소하는 효과를 낳았다. 정부도 공무원 수를 대폭 감축, 감량 경영을 솔선 수범했고, 국민들도 대량 감원과 임금동결,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이겨냈다.

멕시코는 위기후 7개월 만인 1995년 6월 국제 자본시장에 나서 기채를 할 수 있게 됐다. 국제적 금융지원에 힘입어 외환, 증권 시장도 95년 하반기 들어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했고, 치사 직전의 경제는 서서히 회생하기 시작했다.

페소화 평가 절하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확대시켰고, 국제 수지 개선에 결정적 호재로 작용했다. 1994년 184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던 무역수지는 95년 73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됐다. 경상수지가 좋아지면서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도 위기전 수준으로 늘어나 페소화 환율도 안정세로 돌아섰다.

멕시코는 예상외로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고, 세디요 정부는 2년후인 1997년 1월 미국으로부터 받은 125억 달러의 긴급 구제자금 전액을 상환했다. 고금리의 자금을 저금리로 전환한 것이긴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로선 구제 금융의 효과를 선전하기에 좋은 재료였다.

 

▲ 멕시코의 금융위기를 극복한 에르네스트 세디요 대통령. (1994년 12월 1일 ~ 2000년 11월 30일) /위키피디아

 

미완의 금융 개혁

 

그러면 여기서 멕시코가 금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개혁 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펴보자.

페소화 폭락사태가 터지자 세디요 대통령은 곧바로 금융 개혁 작업을 착수했다. 세디요 정부는 페소 폭락이 단순히 외환 고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금융 시스템의 문제에서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구제금융을 제공했던 IMF와 미국 재무부 관리들도 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으면 경제를 수습할 수 없다며, 80년대말 미국이 은행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사용했던 방식을 채택하라고 권고했다. 세디요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Savings and Loan) 구제 금융을 맡았던 전문가와 월가의 금융인들의 자문을 얻어 금융부문에 시퍼런 수술의 칼을 들이댔다.

정부는 은행 정리에 앞서 은행의 악성 여신을 처리할 기구와 기준을 마련했다. 정부가 은행의 부실 채권을 안아 주는 대가로 은행이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과감히 문을 닫겠다는 의지였다.

멕시코 재무부는 페소 폭락이 진정되자마자 95년 3월 은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금보험기구(Fobaproa)’를 설치했다. 이 조직은 미국이 S&L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만든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oration)」와 같은 성격의 기구로, 시중은행들이 발행한 전환사채를 인수함으로써 은행의 부실 여신을 안아 준다는 목적으로 출발했다. Fobaproa는 은행의 악성 자산 450억 달러를 사주었고, 시중은행이 담보로 잡고 있던 스타킹 공장, 5개의 호텔, 1천여 개의 부실 채권을 처리했다.

세디요 대통령은 1997년 아시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은행 부실을 정부가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많은 국민들이 금융산업 도산을 막기 위해 돈(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국민들은 은행을 구제하는데 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금융시스템의 위기가 다른 분야로 옮겨갈 우려가 있고, 이 연쇄반응을 차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멕시코 정부는 은행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 주주 또는 신규투자자들이 1 달러를 투자할 경우 악성 자산 2 달러를 사주었다. 정부는 은행의 부실 채권을 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은행들은 손실을 반분하게 돼 자산가치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세디요 정부는 또 비판을 무릅쓰고 악성 대출이 은행 자본을 잠식한 경우 외국인들이 국내 은행을 인수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반대론자들은 은행을 외국에 넘겨주면 자본 시장이 외국에 지배된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자들은 외국은행이 들어오면 은행의 부족 자본을 충당하고, 경영 노하우를 배우며, 또다른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금융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 단 3대 시중은행은 외국인 매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시티은행, 스페인의 빌바오 은행등이 멕시코 은행 인수에 나섰다. 정부는 국내 은행의 부실 채권을 사줌으로써 외국인의 국내 은행 매입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1990년대초 18개이던 시중은행중 10개가 외국인에게 매각되거나, 다른 멕시코 은행에 흡수됐고 또는 정부 감독 하에 들어갔다.

금융부문의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앙은행은 시중은행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느닷없이 감사팀을 은행에 보내 사기대출 여부를 조사했고, 은행장들을 불러 인사 과정에 청탁이 있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런데 멕시코 금융개혁의 가장 큰 문제는 금융기관의 부실을 털어 줄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세디요 정부는 1998년 Fobaproa의 재원으로 600억~650억 달러가 소요된다며, 이를 승인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이는 GDP의 15%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법안이 통과되면 멕시코 국민들은 30년간 은행의 부실 채권을 갚기 위해 세금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가는 한 농민, 도시서민을 대변하는 야당으로선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야당은 길거리에 나앉은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사악한 금융가와 채무자를 도와줄 수 없다고 주장, 세디요 정부와 정치적 대결을 벌였다. 야당은 금융 개혁안을 승인하기 앞서 은행을 구제하는 과정의 비리를 조사하고, 불법 또는 사기 대출을 한 은행 경영진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며, 중앙은행장, 금융감독 위원장을 타깃으로 공격했다.

멕시코 금융 개혁에서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한때 금융가의 황제로 불렸던 로드리게스씨가 스페인에 도망갔다가 소환돼 법정에 섰지만, 멕시코 법정은 그를 집행 유예로 풀어 줘 빈축을 샀다. 은행이 기업과 짜고 돈을 빌려주는 사기 대출 관행에 대한 정부의 철저한 수사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샀다.

1999년 6월 멕시코 의회는 총 600억 달러에 이르는 은행 구조조정 자금을 의결했다. 이는 GDP의 15%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동시에 멕시코 은행에 대한 외국인 소유에 대한 마지막 제한도 해제했다.

그러나 몇 달후 3위은행인 뱅카 세르핀과 5위인 반크레세르가 불행해지자 이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각각 60억 달러와 99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발표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공적자금을 투자했지만, 은행들의 신규대출을 살아나지 못했다.

금융 구조조정은 국민 다수의 피땀어린 세금을 뺏아 소수의 은행을 살리는 것으로, 경제 정의에 어긋나는 결과를 빚었다.

 

아시아의 모델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멕시코의 개혁을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멕시코는 정부가 초기에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을 처리하지 못한 점, 도덕적 해이를 완벽하게 처리하자 못한 점등을 숙제로 남겨 놓고 있다.

어쨌든 멕시코 경제는 미국과 IMF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났다. 필자가 멕시코를 방문했을때인 1997년, 페소화 폭락의 여진은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있었다. 도시 외각의 공장가에는 청원 경찰들이 갱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정문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고, 관광지 주변 좌판 상의 남루한 옷차림에선 경기 회복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바이어들이 서류를 뒤적이는 모습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가득찬 관광객들에게서 멕시코 경제의 맥박이 다시 힘차게 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멕시코 경제의 거시지표는 경기가 회복단계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사태 직후인 1995년 마이너스 6.2%로 떨어졌던 GDP 성장률이 96년엔 5.1%로 돌아섰고, 97년엔 7.6%를 기록했다. 위기 이전보다 낳은 수치다.

실업률도 1995년 7.5%로 한해 전(3.3%)보다 두배 이상 상승했으나, 96년엔 5.5%로 떨어졌고, 이듬해 3%대로 하락, 금융대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인플레이션도 95년 50%나 치솟앗던 것이 96년 24.8%로 떨어졌고, 97년에는 11%의 안정 수위로 낮아졌다.

그러나 멕시코 경제는 더욱더 외국 자본, 정확히 말하면 미국 자본의 지배에 놓이게 됐다. 만일 미국의 금리가 또다시 높아지거나, 멕시코의 유동성 부족이 심해져 외국인 투자자들이 멕시코를 빠져나갈 경우 1995년의 페소화 폭락 위기보다 더큰 위기가 닥쳐올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금융시장의 글로벌리제이션은 거시 경제정책을 자국의 의지로 운용할 수 없고, 국제 자본의 생리에 영합하도록 귀결지었다. 멕시코 경제는 국내 시장보다는 국제 자본시장의 눈치를 보며 움직이게 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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