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고픈 마음을 그린 효령대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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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고픈 마음을 그린 효령대군 영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6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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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연주암에서 만나는 역사…임금 복장의 온화한 그림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영정을 보려면 관악산을 올라가야 한다. 정상을 오르기 직전에 만나는 절이 연주암(戀主庵)이다. 그곳에 효령각(孝寧閣)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효령대군 영정이 모셔져 있다.

효령대군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동생이 충녕대군(세종)이 왕위를 이어가자 홀연히 승려가 된 왕자다.

영정은 74cm×90cm의 크기로, 카메라로 촬영하면 보호 유리가 빛을 반사해 모습을 담기 어렵다. 조선시대 대군의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으로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따라서 이 영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81호로 지정돼 있다.

 

▲ 혀령대군 영정(왼쪽)과 이를 본떠 그린 글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블로그

 

영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군의 영정이라기보다 임금의 초상화를 연상케 한다. 머리엔 임금이 평상시에 쓰는 익선관(翼蟬冠) 형태의 황색 관모를 쓰고 있다. 깃과 소매에 녹색 선을 댄 홍포(紅袍)로 정장하고 있다. 임금이 입는 곤룡포(袞龍袍)와 다를 게 없다. 앉아 있는 의자도 임금의 의자인 용교의(龍交椅)다. 의자에는 용과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동생에게 임금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임금이 되고 싶은 마음을 초상화에 담게 했던 것일까.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발을 올려 놓은 족좌대(足坐臺)는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온화하고, 수염이 길게 나있다. 몸은 뚱뚱한 편이다. 귀가 길게 늘어진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림 그리는 기법, 즉 화법(畵法)은 일반 초상화 기법보다는, 불화의 냄새가 난다고 한다. 오른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그 지물(持物)의 내용에 대해선 확인되지 않는다.

제작연대는 정확치 않다. 여러번 옮겨 그린 모사본으로, 원본 형태가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효령대군의 인상은 온화하고 불교를 숭상하며 형인 양녕대군과 달리 여자와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임금이 될수 있는 위치에서 기끼이 동생에게 임금자리를 내어준 왕자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그러면 아버지 태종은 맏아들 양녕대군에게서 세자 자리를 빼앗고, 둘째 효령을 건너 뛰고 셋째로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실록엔 이렇게 전한다. (태종 18년, 1418년 6월 3일)

 

임금(태종)이 말하였다.

"효령 대군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 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부왕은 효령과 충녕을 놓고 무척 고심한 것 같다. 효령은 웃음을 잘 웃지만 나약한 것으로 보았다. 술을 한잔도 못하는 것도 흠이다. 중국 사신이 올 때 적당이 술 접대를 해야 하는데 그게 흠이었다. 이에 비해 충녕은 학문을 좋아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적절히 술을 마실줄 안다는 게 장점이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태종은 셋째를 선택한다. 세자 결정을 신하들에게 통보하고 태종은 통곡하고 목이 메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커트라인에서 낙방한 느낌, 그것이 효령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엄한 부왕의 결정에 효령은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부왕 이방원은 조선을 개국하면서 정몽주를 죽이고, 이복동생에 피를 묻혔으며, 개국공신 정도전마저 가차 없이 죽인 인물이다.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모를리 없다.

사는 길은 바짝 엎드려 죽은 듯이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 형 양녕이야 눈밖에 났으니, 말릴수 없지만, 동생 효령은 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세자가 되자, 두 형인 양녕과 효령이 관악산 연주암으로 올라 왔다. 두 왕자는 산속에서 궁궐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맑은 날 연주암에서 궁궐이 보여 마음을 다져잡기 어려워 산 뒤편에 있는 연주대로 옮겨 살기도 했다고 한다.

연주암에 얽힌 또다른 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조선이 서자 관악산으로 올라와 고려 수도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했는데, 이 때문에 ‘주인(主)을 그리워한다(戀)’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 연주다 /사진=김인영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다.

태조 5년인 1396년 태어나 1486년(성종 17년)까지 91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 생애에 7대의 임금이 지나갔으나, 임금이 되지 못했지만 장수라는 또다른 복을 누렸던 것이다.

그의 묘소와 사당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2호. 사당의 이름을 청권사(淸權祠)라고 한다.

여기에도 스토리가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 아들 우중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셋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머리를 깎고 은둔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는 태백을 지덕(至德), 우중을 청권(淸權)이라고 칭송했다.

여기서 본따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을 지덕사, 둘째인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을 청권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지덕사는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했다. 생전에 손자 33명,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시는 1984년 11월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했다.

 

▲ 연주암 효령각 /사진=김인영
▲ 효령대군 영정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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