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그후…아나키스트 설 자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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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그후…아나키스트 설 자리 없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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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이승만-김구 갈등 속에서 좌절…6·25 때 납북후 소식 끊겨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준익은 박열의 인생 스토리를 사실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제훈(박열), 최희서(후미코)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스토리도 흥미진진하고, 일본 여인 후미코의 존재, 아나키즘의 세계 등등…. 그의 인생 자체가 소설이고 영화였다. 가공이 필요없는 스토리 그 자체가 재미는 물론 애잔함을 준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받는다.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가장 말 안 듣는 조선인, 역사상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은 사상 초유의 스캔들! 그 중심에 박열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아나키즘에 과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 치하에 볼온 서적이 금지되던 시절이었지만, 아나키즘 서적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라는 점에서 약간의 허용 공간이 있었다.

▲ /영화 광고물

아나키즘(anarchism)은 모든 정치조직ㆍ권력을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으로, 무정부주의라고도 한다. 아나키즘의 비판 대상은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종교 등에도 미치며,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고 의문에 붙이려는 사상 조류다.

동양에서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 아나키즘이라 할수 있다.

근대 아나키즘 사상의 선두주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활약한 영국의 W.고드윈(William Godwin)이다. 프랑스의 P. J.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에 이어 러시아에서 M.A. 바쿠닌에 의해 아나키즘이 하나의 사상과 운동의 계보로 정리된다.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르키도 무정부주의자였다. 아니키즘 운동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1920년대 일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박열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아나키즘은 폭력을 정당화한다. 국가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제도이므로,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영화에서 박열이 황태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전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백미는 박열과 후미코의 웨딩사진이다.

박열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에서 감옥에서 웨딩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이 밖으로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괴사진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의회가 3일간 중지되는 파동이 벌어진다. 일본은 이 사진을 게제하지 못하도록 보도통제를 한다.

교도소 내 모처에서 후미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비스듬이 책을 읽고 있고, 박열은 그런 그녀의 한쪽 가슴에 느긋하게 손을 얹어놓고 있는 사진이다.

당시 일본 감옥에서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진이 흘러나가자 중의원(하원)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비난의 핵심은 너무 야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진을 찍도록 간수들이 무엇을 했는지 하는 것이고, 박열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배려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담당판사가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사진은 복제되어 돌아다녔고, 일본 정부는 마침내 괴사진을 게재해도 좋다고 허용한다.

동아일보는 이 사진을 게재하면서 ‘법정에서 태연하게 포옹한 박열 부부’, ‘감방에서 두 사람 동거’라는 제목을 달았다.

 

▲ 왼쪽은 동일일보가 보도한 괴사진, 오른쪽은 영화속 장면 /영화 사이트

 

 

영화를 본 후 출옥 후 박열은 어떻게 살았을가 궁금해졌다.

▲ 박열 /국가보훈처

 

박열이 아나키스트로서 독립운동을 했고, 그의 사상은 일본 천황주의와 그를 밑바탕으로 하는 국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좌파든 우파든 국내 독립운동과는 궤를 함께 했다.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 따라 해방후 전개된 미·소 냉전체제 이데롤로기와 남과 북의 이승만-김일성 정권도 부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열은 한편으론 남과 북의 정권을 받아들이고, 때론 이용당했다.

 

무기징역을 받던 박열을 구출해준 것은 미군이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고, 미군의 일본열도 통치가 시작됐다. 그해 10월 27일 그는 미군에 의해 일본 북쪽 홋카이도의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의 나이에 석방된다. 22년 2개월의 긴 세월을 일본 제국주의 형무소에서 감방살이 한 것이다.

 

▲ 출옥한 박열 선생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촬영한 사진 /국가보훈처

 

도쿄에서 선생의 석방환영대회가 열렸다. 영화 『박열』에서 일본 배우 요코우치 히로키가 역을 맡은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藤下伊三郞)가 환영장에 나와 수천의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했다. 후지시타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선생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을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 박열 /국가보훈처

박열이 도쿄로 돌아오자 좌파인 재일조선인연맹 등 좌파조직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46년 1월 20일 박열은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해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동맹의 강령에는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를 넣어 아나키즘 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해방 직후 박열 선생은 이승만과 김구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아니,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커지는 바람에 선생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선생은 김구의 반탁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의 아나키즘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를 받아들일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두 지도자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5월 박열은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세 열사의 유해는 일본의 형무소에서 쓸쓸히 버려져 있었다. 박열은 세 열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모셔 왔다.

이어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했다.

1946년 10월 박열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아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하고, 초대단장으로 추대됐다.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이 맡았다. 초기 민단은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루었고, 반일, 반공을 기치로 삼았다.

 

▲ /국가보훈처

 

이승만은 재일교포 사회에서 차지하는 박열의 위치를 고려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미국을 다녀오면서 귀로에 2차례에 걸쳐 선생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했다. 박열은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혔다. 이승만은 선생을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초빙한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이승만 정부는 부패와 독주로 이어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선생의 이승만 정부 지지 방침은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정세판단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2006년 국가보훈처)

선생은 1948년 2월 재일 조직의 명칭이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박열은 초대되어 귀국했다. 그는 고향(경북 문경)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 장학회를 설립해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 박열 부부 /영화사이트

 

하지만 또다른 운명의 여신이 다가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갔다.

북으로 간 이후 선생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이다.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을 살펴보면, 외국군대의 즉각적 철수와 군대 축소,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적 중립화의 선언 등 민족공동의 이해와 민중 생존권에 입각한 자주, 평화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걸친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선생을 비롯해 조헌영 등은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위원장과 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 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2012년 10월 9일에 개관했으며,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에 먼저 자리잡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

1902.2.3. ~ 1974.1.17. 경북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 출생.

 

 

▲ /아사히신문 보도 /영화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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