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부흥⑩…침몰하는 일본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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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부흥⑩…침몰하는 일본 경제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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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의 역전…월가, 동경 금융시장 무차별 폭격

 

1990년 일본 다이쇼와 제지사의 사이토 료에이 사장은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2점을 무려 1억6,000만 달러에 샀다.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게 한 사건은 사이토 회장의 발언이다. 그는 두 점의 피카소 그림을 죽어서 무덤에 가져가겠다고 밝혔다. 전세계 화랑이 충격을 받을만한 사건이었다.

사이토 회장이 피카소 그림을 산 이후부터 공교롭게도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다. 다이쇼와 제지도 엄청난 부채에 시달렸다. 회장이라는 자가 1억 달러 이상의 그림을 사서 무덤에 가져가겠다고 하는 회사가 성할 리 없었다.

▲ 사이토 료에이 / 위키피디아

1992년 채권은행들은 다이쇼와 제지에 돈 될만한 물건을 거의 압류하다시피 했다. 피카소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피카소 그림의 매각은 주거래은행인 후지 은행의 소관이었다. 후지 은행은 제값을 받겠다며 질질 끌다가 5년후인 1997년에 피카소 그림 두점을 경매를 통해 매각했다. 경매를 맡았던 크리스티측은 물건이 얼마에 팔렸는지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많은 미술 전문가들은 사이토 회장이 산 값보다 10~20% 싼 가격에 판 것으로 계산했다.

1980년대 일본은 잘 나가는 나라였다. 미국 50개주의 하나인 하와이는 거의 일본인에 넘어갔고, 미국인들의 자존심으로 일컫는 헐리웃의 칼럼비아 영화사,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사들였다. 경매시장에서 일본인들은 최대의 고객이었다. 반 고호의 ‘해바라기’등 세계적인 걸작품이 경매에 나오면 일본인들이 높은 가격을 불러 사들임으로써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일본인들의 미술품 매집은 1990년을 고비로 절정에 달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7~1991년 사이에 일본인들이 세계적인 명화를 매입하는데 소비한 돈이 1조엔에 달했다. 비공식적으로 산 명화를 포함하면 공식통계의 세배나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후 일본인들의 사치는 수그러들었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은행과 기업에 돈이 돌지 않게 되고, 부채가 누적됐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들어왔던 미술품들이 한점 두점 일본 밖으로 흘러나갔다.

1990년대말 일본 후쿠오카 은행이 경매에 부친 명화 10점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박물관이 매입, 전시했다.

 

1990년 여름, 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고향인 텍사스 휴스턴에서 개최됐다. 당시 미국 경제는 장기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일본과 유럽 정상들로부터 미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을 치유하라는 질책을 받았다.

그로부터 7년후인 1997년 6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개최된 G-7 정상회담에서 자신에 찬 목소리로 미국 경제시스템을 배우라고 다른 7개국 정상을 가르쳤다. 그해 처음으로 러시아가 선진국 정상들의 모임에 참여, G-8로 회담이 확대됐었다. 당시 미국은 4.1%의 고도 성장에 4.8%의 낮은 실업률, 2.8%의 저물가를 실현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클린턴은 비즈니스 위크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생산성 증대, 시장 개방, 기술 진보, 완벽한 경제정책으로 경기 사이클의 정상적 한계를 연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일본 부호 사이토 료에이가 산 반고호의 작품 /위키피디아

 

무용지물이 된 일본의 무기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저서를 쓴 일본 보수파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는 “미국은 황색인종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며 “하이테크 시대에는 이본이 우위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 문예춘추에 낸 글에서 “일본은 미국의 금융 노예가 아니다”며 미국의 세계 경제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은 2,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재무부채권(TB)을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는 TB를 매각해 국가적인 펀드를 만들어 외국인들의 일본 기업 매입 의도를 저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시하라의 미국 국채 매각론을 들여다 보자.

 

“일본 대장성은 미국 재무부 일본 지부로 전락,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 일본은 미국 재무부 채권을 이용해 미국의 요구에 노(NO)라고 대답할수 있어야 한다. 워싱턴은 도쿄에 지나친 요구를 한다면, 일본은 한꺼번에 미국 재무부 채권(TB)을 매각해야 한다. 그러면 미국 금리가 올라가고, 미국 경제는 멈추고, 뉴욕 증시의 거품이 터진다. 세계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의한 불황에 빠지게 된다. 미국은 우리(일본)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계 최대 채무국가인 미국이 어떻게 세계 최대 채권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그는 미국이 우월주의에 빠져 세계 금융시장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한다며 일본이 미국 경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의 주장은 현실감이 없었지만, 일본의 보수층, ‘미국의 일본 침공’이라고 떠들썩하고 있는 일본 보수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시하라 이외에도 일본 고위층은 수차례 미국 국채를 들먹이며 워싱턴을 위협했다. 그때마다 뉴욕 월가는 일본인들의 위협에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손해를 보고 가져가려면 그렇게 하라는 태도였다.

1997년 6월 24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가 뉴욕을 방문했다. 덴버에서 열린 G-7 회담에서 클린턴에게 수모를 당한 하시모토는 무언가 보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뉴욕에서 열린 한 연찬회에 참석, “일본은 미국 국채를 매각할 용의가 있다”며 심중의 말을 던졌다. 다음날 뉴욕 증시는 폭락하고 채권 시장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월가의 전문가들은 즉각 하시모토의 발언이 무용지물이라는 분석을 퍼부었고, 시장의 충격은 하루의 소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대장성도 총리의 발언이 와전됐다고 해명하며 월가의 보복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다.

뉴욕 월가의 프로들은 일본이 투자한 2,000억 달러가 30조 달러에 이르는 뉴욕 금융시장의 규모에 비해 그리 큰 돈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또 시장 논리상 일본이 TB를 일시에 매각, 엔화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TB를 일시에 대량 매각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

첫째, 금리 차이와 시장 안정성이다. 돈은 금리가 낮은 쪽에서 금리가 높은 쪽으로, 불안한 시장에서 안정된 시장으로 움직인다. 미국 재무부 채권 금리는 6.5% 정도인데 비해 일본 엔화 금리는 1.5% 정도다. 돈의 생리상 5% 포인트의 금리 손해를 보며 빠져나갈수 없다. 미국 경제가 안정된 호황을 유지하는 반면,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에 허덕이고 있다. 금리도 높고, 안정된 시장에서 돈이 빠져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둘째, 엔화가 급등, 일본 수출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한꺼번에 2,000억 달러의 돈이 엔화로 전환되면 국제 외환시장에 달러가 넘치고, 엔화가 부족하게 될 것이므로 엔화 급등, 달러 급락의 현상이 나타난다. 수출 중심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일본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셋째, 갑자기 TB를 매각하면 가격이 폭락, 제값을 받지 못한다. 부도난 회사가 자산을 헐값에 매각할 때 이득을 보는 사람은 매입자다. 일본이 미국을 보복하려고 TB를 매각하면 미국의 금리는 일시에 높아지지만, 월가의 충분한 자금으로 이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

넷째,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일본이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 관리들은 워싱턴 행정부와 월가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한다. 미국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려다가 진주만 공습때처럼 동경 금융시장이 무차별 폭격당한 과거를 재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다섯째, 일본 금융기관들이 더 이상 재무부(대장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대장성의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았다. 그땐 일본 주식회사의 CEO는 다름 아닌 대장성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대장성의 정책이 실패로 귀결되고, 각종 정부 규제가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대장성이 금융기관 또는 종합상사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매각하라고 지시할 힘과 명분을 잃었다.

 

1995년 5월 엔화가 1달러당 80엔까지 폭등했을 때 일본 경제관료들은 워싱턴을 방문, 당시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을 만나 “달러가 더 떨어지면 우리는 보유외환(TB)을 매각해 금으로 전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때 서머스를 만났던 일본 관리들은 나중에 그것은 위협이었을뿐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실토를 했다.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고, 일본 경제도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오히려 일본 엔화 자금이 뉴욕 금융시장에 들어와 TB를 사는데 사용됐다. 일본 지식인과 고위관료들은 툭하면 미국 국채 매각론을 들먹이지만, 워싱턴의 콧대높은 미 재무부 관리들이나 월가 베테랑들은 TB 매각이라는 일본의 무기는 추진력을 잃은 러시아의 핵무기에 불과하다며 코웃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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