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비사성을 가다…서해의 교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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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비사성을 가다…서해의 교두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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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요동반도 끝에 위치

 

비사성(卑沙城)은 요동반도가 뾰족한 끝을 서쪽으로 내밀면서 북으로 발해만, 남으로 황해를 가르는 곳에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때 중국 해군(수군)을 저지하던 성이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오는 항로는 산동반도의 등주에서 묘도열도를 따라 대련으로 와서 장산열도를 타고 압록강 입구로 가는 길이다. 이 항로의 육지쪽 중간지점에 비사성이 위치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 대련시 금주(金州)구 대흑산에 위치해 있다. 중국에서는 대흑산성(大黑山城)이라고 부른다.

2012년 6월 대련을 방문한 일행은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는 비사성을 방문하기로 했다. 승합차 한 대를 빌려 굽이굽이 커브길을 달려 대흑산에 올랐다. 산세가 가팔랐다. 밑을 보면 천길 절벽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비사성에 대해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조)

정상에 올라 바다쪽을 바라보았는데, 날씨가 흐려 바다는 보지 못했다.

성의 흔적은 일부만 남아있었다. 돌의 흔적을 보아 최근에 급조한 느낌도 들었다. 한자로 '卑沙城'이란 붉은 글씨의 표지가 붙어 있었는데, 콘크리트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당국이 한국 관광객을 겨냥해 만들어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성이라기 보다 천연의 요새다.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적병이 올라오기 힘든 구조다. 『삼국사기』의 설명대로 서쪽만 막으면 아무리 많은 수의 군대라도 함락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성 형태는 포곡산성이다. 골짜기를 끼고 삼면에 성을 쌓아 포위하는 형태다. 대흑산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3km 정도에 걸쳐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당의 침공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을 샇았다고 하는데, 비사성이 남쪽 끝자락이 될 것이다.

중국은 비사성 자리에 옥황전이라는 도교 사당을 세워 놓았다. 이 곳에서는 황해의 일출과 발해만의 일몰을 볼수 있다고 한다. 도교 사당으로 적합한 곳이다.

 

▲ /그래픽= 김인영

 

『삼국사기』에는 비사성에 관해 두 군데 기사가 나온다.

 

① 수나라 침략

 

 7월,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5년, 서기 614년)

 

이때까지만 해도 수나라는 해군을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수나라 해군이 비사성을 침공했지만, 우리 병사가 맞서 싸우자 곧바로 배를 돌려 평양으로 향했다. 고구려 영양왕이 외교적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수나라는 이에 응한다.

 

 

② 당나라 침공

 

4월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程名振)이 병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어 8천명의 남녀가 죽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서기 645년)

 

고당(高唐) 전쟁에서 중국은 해군을 전쟁에 본격적으로 동원한다. 당태종은 진대덕(眞大德)과의 대화에서 “‘내가 군사 수만을 발하여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필시 힘을 기울여 나라를 구하고자할 것이니, 따로 수군을 보내어 동래를 출발하여 바닷길로 해서 평양을 들어가 수륙군이 합세하면 취하기가 어렵지 않으리라···”고 했다.

수나라는 육군 위주로 병력을 편성해 고구려를 침공해 실패한데 비해 당나라는 수륙 양면의 공세를 취했다.

당나라 시대에 고구려 침공 과정에서 장량(張亮)은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평양성으로 직공할 목적으로 500여 척의 군함과 수로군 43,000명을 거느리고 3월 중순에 산동반도의 동래항을 떠났다. 점점이 이어진 묘도군도를 따라 항해를 하다가 4월 말에 이르러 요동반도의 제일 남단에 있는 비사성에 닿았다.

요동만에는 고구려가 구축해 놓은 해양방어체제가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거점이 비사성이었다. 요동반도 남단인 금주만과 대련만을 관리하는 해양방어체제로,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연근해항로의 해상 교두보에 해당한다.

비사성 전투에서 양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고구려는 비사성을 잃고 고구려 군인과 백성 8,000명이 사망했다.

장량은 비사성을 함락한 후에 부하들을 시켜 압록강 어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비사성 함락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압록가 어귀에서 당나라 수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대처해, 당의 침공을 저지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이 길다란 해안지역에도 촘촘하게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했다. 수암(岫岩)·장하(庄河)·봉성(鳳城)·단동(丹東) 등에 크고 작은 성들이 있다.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한국해양사’에 따르면 요동반도의 남쪽에는 광록도·대장산도·해양도·석성도 등 몇 개의 섬에 고구려 산성이 있다. 고구려에 수군이 황해와 발해만에 강력하게 버티고 있었다는 증거다.

 

▲ 비사성 남문 /사진=김인영
▲ 비서상 표지 /사진=김인영
▲ 비사성 성벽 /사진=김인영
▲ 절벽이 병풍처럼 비사성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김인영
▲ 옥황전 /사진=김인영
▲ 옥항전 내부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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