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이 없었으면 독일통일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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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이 없었으면 독일통일 가능했을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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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총리 별세…주변 강국의 견제 뿌리치고, 동독 주민 지지 얻어내

 

독일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전 총리가 16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최장기 서독 총리를 역임하면서 1990년 독일 통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이 가능했을까. 그가 독일 통일을 주도한 과정을 되짚어본다.

 

1984년 2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장례식에서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과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총리가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유럽은 동서 냉전이 격화하고 있던 시절이다. 1983년 서독 의회는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을 승인했고, 소련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동서독 사이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장례식 참석차 소련에 온 두 총리는 모스크바의 한 정원에서 두터운 외투를 입고 동서독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독일 분단은 강대국 간의 이해 충돌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증진하되, 민족 내부의 관계개선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는 내용이었다. 두 총리는 서로를 초청했다.

그 초청을 3년후인 1987년에 이행했다. 콜 총리는 주말을 이용해 개인자격으로 2박3일 일정으로 동독을 방문했다. 그가 먼저 들른 곳은 고타와라는 곳이다. 그를 발견한 동독주민들이 몰려와 사인을 받았고, 어떤 노동자는 “총리님,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세요”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바이마르를 거쳐 드레스덴으로 갔다. 드레스덴에선 백화점에 들러 쇼핑도 하고, 축구시합에 참석해 경기도 관람하고, 오페라하우스도 방문했다. 동독 당국과 경찰들은 긴장했지만, 그는 여유만만, 동독 주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의 짧은 여행이 준 정치적 메시지는 동과 서의 독일은 하나의 민족이며, 당신들 뒤에 서독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심리적 효과였다.

 

▲ 헬무트 콜 독일 전 통리(1930년 4월 3일~2017년 6월 16일) /위키피디아

 

1980년대말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났다. 1989년 들어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정부는 서독으로 이주하려는 동독 주민들에게 자유여행을 허가했다.

동독 정부가 헝가리 정부와 서독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고, 동유럽으로 가는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콜 총리는 소련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동서독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부다페스트와 체코 프라하를 경유해 탈출하는 동독 주민들이 급증하자 콜 총리는 외무장관을 프라하로 보내 동독 난민들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서독으로 마음껏 이주하라며 특별 열차를 제공했다.

1989년 10월 9일 동독 라이프찌히에서 7만명의 시민들이 평화 시위를 벌였다. 동독정부는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콜 총리는 동독 정부를 비난하면서 동독 정부와 주민을 분리하는 자세를 취했다. 라이프찌히 주민들은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다. 10월 16일 라이프찌히에는 12만명이 시위를 했고, 이틀후 호네커 동독 총리가 사퇴했다.

그의 후임으로 선출된 에곤 크렌츠 당서기는 동독 주민의 여행 자유를 약속했다. 동독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두 나라는 겉으로 독일 통일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어찌하면 독일 통일을 저지하고자 애를 썼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동독이 쉽게 서독에 흡수통일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주변의 강대국들은 6자 회담의 개최를 합의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서독, 동독이 참여하는 회의였다.

11월 9일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들에겐 헝가리와 체코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는 먼길을 갈 이유가 없었다. 1961년에 세워진 장벽은 동서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고,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붕괴이자, 독일 통일을 의미했다.

 

▲ 1989년 10월 9일 동독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콜 총리는 서둘렀다. 프랑스와 영국,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통일을 이뤄야 했기 때문이다. 동독내 강경파들은 무력을 사용해 시위를 저지하자고 주장했지만,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군대 동원을 반대했다. 고르바쵸프의 평화주의 철학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막은 것은 분명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압력을 넣어 독일 통일을 막도록 했지만, 고르바쵸프의 개혁 개방 노선이 독일 통일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동독의 크렌츠 당서기는 동독이 무너지리라고 믿지 않았다. 고르바쵸프도 동독이 민주적 개혁을 단행하고 주민들을 진정시키면 시위는 잦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해 11월 동독에선 한스 모드로프(Hans Modrow) 총리가 선출됐다. 동독의 권력은 크렌츠 당서기와 모드로프 총리로 이원화되었다.

모드로프는 동독과 서독이 하나의 ‘계약공동체’로 운영되길 원했다. 동독과 서독이 별도의 주권을 갖는 일종의 국가연합이다. 콜 총리는 이를 받아들였다. 통일을 원치 않는 주변국을 설득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콜 총리는 “독일은 유럽의 한 부분이며, 동독은 독일의 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영국 대처수상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통일되면 국토가 3분의1 이상 증가하고 인구가 8천만명이 된다. 독일은 유럽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통일을 지지했다. 독일이 통일되면 강력한 힘으로 소련을 저지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은 나토 회의에 참석하면서 독일 통일을 찬성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영국과 이탈리아 총리는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콜 총리는 통일이 독일 국민의 힘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주변국들의 강한 의심을 누그러뜨리는 제스추어를 취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에는 절대로 통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독일인들에겐 강한 통일 의지를 밝혔다.

 

그해 12월 19일 콜 총리는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열기가 대단했다. ‘독일의 콜 총리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콜 총리에게 독일을 통일해달라는 희망이었고, 요구였다. 동독의 모드로프 총리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모드로프는 150억 마르크의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콜 총리는 단박에 거절했다.

다음날 콜 총리는 동독 주민들 앞에 섰다. 임시로 마련된 강단에 경찰의 도움으로 군중을 뚫고 올라섰다. 그는 자유와 평화, 민족의 자주권을 제시했다. 콜의 연설은 동독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동독 지도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통일을 저지할수 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했다.

 

▲ 독일 통일의 상징,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위키피디아

 

동독의 재정이 파탄 지경으로 갔다. 세금이 걷히지 않아 예산집행이 어려웠다. 곳곳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동독 정부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가 바뀌어 1990년 1월 50만명이 동독을 빠져 나갔다. 2월 동서독의 총리는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만났다. 모드로프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하지 않으면 5월까지 버티기 어렵다며 하소연했다. 콜은 다시 거절했다. 그러자 서독 야당들이 반발했다. 동독주민들이 굶어가는데, 같은 민족이 지원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며 콜 총리를 공격했다. 콜 총리의 작전은 동독 정부를 바짝 굶겨 항복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서독 야당은 퍼주자는 논리를 폈다. 결국은 요구한 금액의 3분의1인 50억 마르크 지원으로 낙착됐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그동안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독일 통일을 반대했다. 그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이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가져올수 있고, 세계 평화의 손실을 의미한다”며 독일의 자제를 요청했다. EU의 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소련이 적극 동독 정부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더 이상 동독 지도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독일 통일을 막는 마지막 수단은 6자 회담이었다. 러시아 군대가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한 통일 독일은 나토에 가입할수 없다. 소련은 독일이 통일되면 중립국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6자 회담이 열리면 독일 통일은 국제정치의 역학에 의해 기형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다.

콜 총리는 통일을 서둘렀다. 동독 주민들을 통일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서독의 야당들은 동독 이주민의 제한을 주장하고 급진적인 통일이 독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짜르란트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콜의 통일정책을 비판하는 정당이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콜 총리는 밀어붙였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의 자유선거에 서독의 정당이 참여하기로 했다. 동독의 집권여당인 사회통일당(SED)는 썩어도 준치, 콜의 기민당(CDU)은 이길 가능성이 없는 선거였다. 초반 여론조사에서 기민당의 지지도는 11%에 불과했다. 동독 정부의 방해도 심했다. 서독 정당의 연설회에 마이크 선을 절단하기도 했다.

 

선거직전인 2월 13일 동독의 모드로프 총리가 17명의 장관을 대동하고 또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콜 총리는 이를 거절하고 화폐를 통일하자고 했다. 화폐 통일은 주권을 단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콜 총리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대1로 교환한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당시 통화가치로 보면 동서독 통화 가치는 1대3 또는 1대4 정도였다. 하지만 콜 총리가 동독 돈을 서독 돈과 같은 액면가로 바꿔준다고 하자 동독 주민들이 환호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선거 결과는 콜 총리가 소속한 기민당의 승리였다. 콜 총리의 기민당은 동독의 41.8%의 지지를 얻어 동독의 제1당이 되었다.

독일 통일은 동독 주민들이 투표소에서 서독 정당을 지지함으로써 이뤄졌다. 독일 국민들의 자주권의 표현으로 이뤄진 통일이기에 주변국가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소련의 동독 주둔군의 철수 문제는 돈으로 풀었다. 소련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돈을 원했다. 6자 회담에서 콜 총리는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게 통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하고 통일 독일 군대를 37만으로 제한하며, 소련군 철수 비용 대가로 150억 마르크를 지원하는 조건에 합의를 얻어냈다.

 

1990년 7월 1일 화폐 통합이 이뤄지고, 그해 10월 3일 동독 의회는 독일 통일을 가결하고 해산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서독 총리에서 통일 독일의 총리로 신분이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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