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또다른 광기가 만든 감금…『광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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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또다른 광기가 만든 감금…『광기의 역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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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이성 중심의 서구가 배척·감금한 인간의 특성"…권력의 표출

 

누가 미친 사람인가. 내가 미쳤나, 당신이 미쳤나. 미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의 틀에서 설명해 보자. 길거리에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 하지만 모두가 발가벗은 목욕탕에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이슬람 교조주의가 판을 치는 아프가니스탄에 기독교 포교활동을 벌이다 붙들린 대한민국 사람들. 그 때 우리 사회는 이슬람 테러주의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한국 교인들은 무모한 짓, 즉 미친 짓을 한 것이다.

 

▲ /한글판 책표지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원제: Histoire dela folie a l'age classique)를 읽을 때 앞에서 비교한 상대성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용어 자체도 어려웠거니와 번역도 난해했다. 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광기’(madness)의 개념이었다. 그저 미친 사람, 제정신이 아닌 사람, 이성을 상실한 사람 정도의 상식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 들어갔는데, 푸코는 광인 또는 광기를 사회권력 이념의 상대적 개념을 도입해 논리를 전개했다.

 

푸코의 서술은 중세말엽 나병이 사라지던 시기로부터 출발한다. 중세의 문둥병은 서구에서는 종교적 개념으로 이용되었다. 유럽에서 나병은 신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다는 증표이며 구원의 대상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 나병의 근원인 중동지방과 차단되고 나병 환자들이 격리 수용되면서 언젠가부터 나병이 사라졌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나병을 대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그것은 병원이었고, 수용소였다.

나병을 대체해 수용된 사람들은 광인이었다. 중세 상업도시들은 여러 마을을 떠도는 광인들을 배에 태워 미지의 땅으로 보냈다. 미지의 세계로의 격리였다. 그렇지 않은 광인들은 수용소에 감금시켰다.

17세기 파리의 수용소에는 파리 시민의 1%이상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엄청난 인원이 모두 광인은 아니었다. 감금된 자들은 권력구조에 의해 광인으로 규정된 자들이다. 거리의 빈민들은 자의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수용소에 죄인과 같이 감금되었다. 땅을 잃은 농민, 상이군인, 낙오병, 실업자, 극빈학생, 환자 등이 노동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이란 이유로 체포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노숙자들이다. 현대사회로 치면 노숙자들을 체포한 것이다.

더군다나 빈민층의 결혼이 야만적이라고 표현되는 부분은 충격적이었다. 강제 노동을 하며 자정상인의 임금보다 4분의 1정도를 받아야만 했던 이들은 걸인을 격리시키려는 정부의 권력구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광인들도 빈민들에 섞여 같은 상황에 감금되었다. 그들은 도덕적인 교육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가두어진 채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광인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은 인간성이 상실된 동물에 불과했다. 목과 손목 발목 등에 쇠사슬이 감겨졌고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성을 상실한 동물성을 가진 인간. 그것이 광인이었다. 인간을 동물로 파악하고 그들을 감금하며 관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광기였다.

파스칼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sanity)을 확안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서구의 역사에서 게으른자를 광인으로 분류해 대감금의 시대를 가진 것은 그 당시 이성적인 사람들이 행한 광기였다. 이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들의 권력의 표출이었다.

 

푸코는 광인을 사회와 권력과 연관시켰다. 정신분석학에서 분류하는 미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회에서 규정하는 광인을 정의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광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역사의 시점에서 나타나는 권력구조가 광인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근대 사회에 들어와 데카르트의 이성론이 얼마나 광인에 대해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도 서술했다. 이성은 비이성(광기)를 배제하고 감금하고 침묵시켰으며 이 권력구조는 프랑스의 대감금, 대혁명 직후에 등장한 정신병원을 통해 잘 드러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의 광기를 소유하고 있다. 광인은 이런 비이성적인 부분들이 더 두드러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광인들을 억압하고 감금하는 형태는 광인이 광인에게 하는 또 다른 권력의 표출 형태라고 푸코는 지적한다.

광기의 치료는 처음에는 병원의 기능이 아니었다고 한다. 병원의 역할은 격리와 교화에 있었다. 광인의 치료는 정신적인 것이 아닌 신체적인 것이 주된 대상이었고 이것은 곧 도덕적 교화로 연결된다. 즉, 광인을 교화시키는 것이 곧 광인을 치료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narrenshiff(바보들의 배) /위키피디아

 

제7장의 ‘대공포’ 첫머리에 푸코는 데카르트를 언급한다. 데카르트는 스스로가 광인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그는 비이성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아 왔지만 그 자신이 방법적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데카르트 시대의 이성은 비이성에 대한 감금으로 표출되었다. 비이성은 곧 광기였다.

비이성을 감금시킴으로써 비이성에 대한 공포를 없애려 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중엽부터 등장한다. 사람들은 감금 수용소에서 발생하는 신비한 질병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의 존재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성과 괴리되었던 비이성의 세계가 직접적으로 이성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1780년 풍토병이 파리를 휩쓸었고 그것은 오피탈 제네랄(병원)이 원인인 것처럼 여겨졌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19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 지성들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식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의 갈등은 설명했지만, 여성, 의핵, 정신병, 환경, 소수민족, 범죄등 새로 제기되는 사회문제에 대해 무능했다. 1961년 발간된 『광기의 역사』는 “권력과 관련된 억압은 계급이라는 단일의 구조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의 관계에서도 찾아질수 있다”는 사실을 설파했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가 풀이하는 권력을 넘어서 권력을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찾아낸 것이다.

 

▲ 미셸 푸코 / 위키피디아

푸코는 1955년 스웨덴 있는 프랑스 문화원 원장으로 일했다. 웁살라 대학 강사를 겸하면서 푸코는 이 곳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광기의 역사』를 완성했다. 그는 ‘광기’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당시 서구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해부했다. 푸코는 실증적인 문헌을 들이댔다.

『광기의 역사』는 처음엔 그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는 1,000여 쪽에 이르는 이 대작을스웨덴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낼 생각이었지만, 이를 검토한 교수는 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기교에 넘친 문학작품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논문으로 제출되지 못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소르본 대학에서 비로소 학위로 인정받았다.

푸코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프랑스 대사관 문화 참사관, 독일 함부르크의 프랑스 문화원장, 그 뒤 프랑스로 와서 클레르몽 페랑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를 하다가 브라질에 가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는 관료 생활을 하면서 『말과 사물』을 저술했다. 푸코는 엄청난 역사 자료들을 시시콜콜하게 파고들어 한 시대의 지식을 형성하는 큰 틀을 드러냈다. 그는 지식이란 이성적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다기보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 구조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1970년, 푸코는 마침내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로 간주되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5월 혁명으로 자유와 개혁의 물결이 강하게 일고 있던 시절에 그는 사르트르와 더불어 진보적인 지식인의 범주에 들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이념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 등 항상 핍박받는 이들 편에 섰다. 1970년에서 1984년 사이에 푸코는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의 역사를 분석했다. 과거의 권력은 잔인한 공개 처형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대중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권력 행사는 더 큰 저항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인권이 중시되고 권력에 균형과 견제가 이뤄지는 현대에서는 권력은 권력은 눈에 띄지 않도록 섬세하게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한다. 그 방법은 바로 ‘규율과 지도’이다. 게다가 권력의 통제는 점점 더 효율적이 되어 간다.

그는 1976년부터 『성(性)의 역사』를 썼다. 스스로 성소수자인 그는 성이라는 소재로 지식과 상식이 만들어지고 권력이 작용하는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완성되지 못한채 1984년 푸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져 숨을 거둔다.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향년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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