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연대기Ⅱ]③ 영화의 아버지 조르주 멜리에스 (하)-영화 '휴고'에서 만난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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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연대기Ⅱ]③ 영화의 아버지 조르주 멜리에스 (하)-영화 '휴고'에서 만난 거장
  •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 승인 2022.02.0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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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휴고’에서 재조명한 멜리에스의 업적
현대 영상의 거의 모든 것의 기본 개념을 만들어 내다
에디슨과의 악연, 모든 것을 잃고 쓸쓸한 말년을 보낸 멜리에스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1895년 초창기 영화들 중 한 편은 ‘기차의 도착’이다. 그건 기차 장면 이상의 충격이었다.

은막에서 기차가 속력을 내자 관객이 비명을 질렀다. 깔려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서커스 공연 막간의 맛보기였을 뿐인데 제작자들은 영화가 이야기를 들려줄 새 수단임을 알아챘다.

영화 제작자인 조르주 멜리에스는 그 걸 알아본 최초의 1인이었으며, 영화가 꿈을 사로잡는 힘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영화 “휴고” 중).

지난 2011년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제작한 영화 ‘휴고’에는 이런 멜리에스의 이야기가 잘 담겨있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동화 ‘휴고 카브렛의 발명’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가상의 인물인 휴고라는 한 고아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영화의 원형을 만들어 낸 영화의 거장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극 중의 멜리에스에 얽힌 이야기들은 사실에 기반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휴고’ 멜리에스의 전기적 영화다. 사진=유튜브 캡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휴고’ 멜리에스의 전기적 영화다. 사진=유튜브 캡처

현대 영상의 모든 것을 만든 멜리에스

멜리에스를 현대 영화의 아버지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화 제작자로서의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그가 만든 영화의 다양한 장르에 기인한다.

그는 뤼미에르와 같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영화뿐만 아니라 코미디, 드라마, 시대극, 공상과학까지 넘나들었고,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멜리에스는 영화에 최초로 여성의 누드를 촬영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 그는 공연 실황을 담은 뮤직 비디오까지 만들었다. 1897년 당시 인기 가수 파울루스의 의뢰를 받아 그의 공연을 영화화한 것이다.

멜리에스는 그의 스튜디오에 30개의 아크 램프와 수은 램프를 달아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무성 영화 시절이었기에 영화에 소리를 담을 수 없었고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가수가 영화관 스크린 뒤에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멜리에스는 영화 형태의 영상 광고들도 만들었다. 위스키나 초콜릿, 유아용 시리얼과 같은 제품에 대한 것들로 이러한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인 ‘재미있는 포스터’라는 작품을 보면 일종의 PPL을 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멜리에스는 새로운 시각 경험을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앞서 말한 인 카메라 편집 외에 1902년 멜리에스는 캐릭터의 크기가 변하는 일루젼을 만들기 위해 카메라 움직임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비록 카메라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닌 배우가 프레임에 맞게 직접 위치를 옮기는 도르래가 설치된 의자에 앉아 있는 형태였지만 포커스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위치를 계산해냈다.

그 결과 ‘고무 머리의 남자’나 작은 요정들이 화면에 떠 다니는 영화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멜리에스가 현대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로운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그 분야에 있어 당시 멜리에스는 세계 영화의 최고의 감독이자 최고의 영화 기술자였음은 분명하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영화 ‘휴고’를 통해 잊혀진 영화의 거장 멜리에스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영화 ‘휴고’를 통해 잊혀진 영화의 거장 멜리에스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에디슨과의 악연이 만든 쇠락의 길

하지만 이러한 멜리에스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영화 ‘휴고’에도 언급되지만 멜리에스의 말년은 초라했다. 영화에 묘사된대로 그는 노년에 파리의 기차역 근처에서 장난감을 팔며 살았다.

그의 명성이 영락하게 된 것은 우리가 발명왕이라고 추앙하는 토머스 에디슨과의 악연에서 시작되었다. 에디슨은 초기 저작권법을 교묘히 악용했다. 멜리에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달 세계로의 여행’이 엄청난 흥행을 이루자, 에디슨은 그의 작품을 불법 복제한 프린트를 얻었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본들을 복제했다.

‘달 세계 여행’은 미국 시장에서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했지만, 그 많은 수익은 단 한푼도 멜리에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멜리에스는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 더해 1910년 ‘화성 여행’이라는 멜리에스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영화를 만들어 미국에서 개봉했다. 저작권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던 시대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에디슨은 그의 업적을 훔쳤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멜리에스는 새로운 작품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모든 권한을 양도하는 대가로 파쉐에게 거액의 자금을 받은 멜리에스는 그의 마지막 영화 경력을 불태울 ‘뮌하우젠 남작의 꿈’(1911)과 피어리와 아문젠의 북극 남극 탐험을 그린 ‘극점 정복’(1912)을 제작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재정적 위기에 봉착한다. 결국 파산을 선고받은 멜리에스는 모든 것을 빼앗긴 후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영화 ‘휴고’에도 언급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1920년대 후반에 들어 그의 종적을 찾아 헤매던 몇몇 영화 관계자들에 의해 멜리에스는 다시 영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그 영예가 노년의 멜리에스가 겪고 있던 재정적 궁핍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멜리에스 그 자신의 영화를 보고 자란 수많은 ‘멜리에스 키드’들이 만들어 가는 현대 영상의 눈부신 발전을 지켜보다가 1938년 병으로 사망한다. 

노년의 조르주 멜리어스. 그는 불운했던 말년을 등지고 세상을 떠난뒤 현대 영화의 아버지로 재조명 받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노년의 조르주 멜리어스. 그는 불운했던 말년을 등지고 세상을 떠난뒤 현대 영화의 아버지로 재조명 받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노년의 조르주 멜리에스

멜리에스가 현대 영상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뤼미에르는 영화를 예술적 관점이 아닌 과학적 연구나 기록의 관점에서 보았다. 일종의 영화를 지금의 다큐멘터리의 관점에서 봤던 것이다.

멜리에스는 이러한 점에서 마술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마술사로서 영화를 마술의 가장 훌륭한 도구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통해 현실이 아닌 가짜이지만 무엇보다 환상적인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시각적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멜리에스의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1905년부터 영화 제작자들은 자신들을 촬영 기사가 아닌 스토리텔러 즉 감독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 내에서 장면을 어떻게 배열할지 제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까지 영화 편집 및 후반 작업을 위한 스플라이서의 표준화가 이루어졌고, 영화에서는 지금의 우리가 말하는 ‘편집’이 일상화되었다.

이는 영화가 산업적으로 예술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 시작의 중심에 조르주 멜리에스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동열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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