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고분…마한 해상세력일까, 倭의 선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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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고분…마한 해상세력일까, 倭의 선조일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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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일본서기의 침미다례로 보이는 마한 시기 해상세력” 추정

 

마한 시대의 해상세력이라. 애매하다. 전남 해남 바닷가 무덤에서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다량의 유물이 발굴됐다. 그 유물의 원주인은 누구일까.

문화재청은 (재)대한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해남 화산~평호 도로개설공사 구간 내 유적’에서 3세기부터 4세기에 조성된 마한 시기의 대규모 고분군이 확인됐다고 발표하면서 출토된 유물이 마한 해상세력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재청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침미다례(忱彌多禮) 집단의 실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침미다례는 해남반도에 자리하였던 마한의 주요 세력으로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南征) 과정에서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 해남 고분 발굴 위치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년(369년)조에는 “왜가 비자벌(比子伐: 경남 창녕)·남가라(南加羅: 경남 김해)·안라(安羅: 경남 함안)·가라(加羅: 경북 고령))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古奚津: 전남 강진)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 新彌國)를 정벌하고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伴古) 등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내 사학자들은 왜가 백제에 땅을 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편찬자에 의해 왜곡과 윤색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4세기 후반에 마한 잔여세력을 정복하고 영산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그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에는 “그해(즉위 24년, 369년)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기록과 땅 속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호남지방의 마한 세력을 그려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중국 사료를 보면 의문이 드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하나가 한반도 남쪽에 왜족(倭族)가 있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몇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자.

중국 서진(西晉)시대 진수(陳壽, 233 ~ 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의문의 몇 구절이 나온다. 3세기 후반에 중국인이 쓴 역사서다.

 

①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南與倭接), 면적이 사방을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②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편평하다. 왜(倭)에 인접한 곳의 남녀들(男女近倭) 또한 문신을 한다.

③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其瀆盧國與倭接界)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은 중국인들이 3세기 후반에 동이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기행담을 모은 사서로, 당대의 시점에서 서술한 사서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 한(韓)의 남쪽에 왜와 접(接)해 있고, 진한과 왜가 가까이(近)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接界)고 하질 않는가. 그렇다면 3세기에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는 “왜인들이 문신을 하는데,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는 기사가 있어 왜와 가까이 있는 진한의 남녀가 문신을 따라했다는 기사에 설득력이 있다.

상식적으로 왜는 일본 열도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서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루고 있다”고 해, 일본 열도가 왜인의 본거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동이전> 한조에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를 가설로 삼아 한반도에 존재한 왜의 위치를 살펴보자.

마한은 서쪽에 있다(馬韓在西)고 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辰韓在馬韓之東)고 했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이고, 변한은 부산 경남 지역이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그러면 한(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과 남쪽으로 접하고, 변한의 한 국가인 독로국과 접하며, 진한과 가까운 곳은 바로 전라도 지역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전라도 일대에 왜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 해남 석호리 대지유적 목관묘 발굴 현장 /문화재청

 

문화재청 발표에 따르면, 이번에 발굴조사중인 전라남도 해남 안호리·석호리 유적은 해남반도의 남서쪽 바닷가에 맞닿은 산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마한 시기에 조성된 5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매장시설은 100여기 정도의 목관묘, 직장묘(토광묘), 옹관묘(甕棺墓, 독무덤) 등이 약 100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분은 봉분 주위로 사다리꼴의 도랑(周溝, 주구)을 두른 마한 전통의 무덤 양식으로 중앙에는 목관묘 혹은 옹관묘를 안치하고 외곽에 옹관묘와 목관묘, 직장묘 등을 추가로 매장했다. 고분은 도랑을 공유하면서 맞물리게 축조하고 있어 같은 집단의 공동 묘역들이 군데군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단경호(短頸壺, 목 짧은 항아리), 이중구연호(二重口緣壺, 겹아가리 항아리), 양이호(兩耳壺), 조형토기(鳥形土器) 등의 토기류와 함께 환두도, 철부(鐵斧, 철도끼), 철정(鐵鋌, 쇳덩어리), 철도자 등의 철기류와 시신의 목에 걸었던 구슬류 등 200여 점 이상의 부장유물이 수습되고 있다. 부장 유물을 검토한 결과 고분이 만들어지던 시기는 기원 후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해남반도에서 같은 시기에 조성된 해남 부길리옹관묘, 분토리고분군, 신금취락 유적 자료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일단 문화재청은 해남 안호리·석호리 대지유적에 집단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백포만 일대에서 철기를 매개로 대외교류에 참여했던 마한 해상세력으로 판단했다.

그러면 우리가 마한이라고 정의하는 세력은 어떤 집단일까.

호남 문화의 원류인 마한을 연구해온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의 주장을 들어 보자. 그의 주장은 전남대 출판부가 엮은 「전라도를 다시 본다」는 책자 가운데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라는 주제에서 엿볼수 있다.

 

임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의 마한 문화는 경기·충청 지역의 백제 문화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마한이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고, 이웃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문화와 차이점을 드러냈다는 것.

임 교수는 호남의 마한 문화의 특징으로 ①벼농사 시작 ②중국 강남지역의 지석묘와 관련성 ③목간(木簡)에 글을 새기는 동사(銅鉇)의 사용 ④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동검인 도씨검의 출토 ⑤가족을 합장하는 분구묘 성행 등을 들면서 중국과 교류한 흔적을 찾았다.

임 교수는 중국 정사의 하나인 『양서(梁書)』 「백제전」를 들어 마한이 16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임영진 교수는 기원전 300년 경에 일본 규슈 북부에서 일어난 야요이 문화가 마한에서 전래됐다고 주장했다. 야요이 문화의 핵심 요소인 청동기, 벼농사, 주거지, 지석묘, 석기, 토기등이 모두 마한에서 건너갔다는 것. 영산강 유역에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옹관 문화가 6세기초까지 발전했다는 사실도 이 지역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는 증거다.

임 교수는 고대 일본의 원류가 백제문화라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백제에 앞서 마한이 일본 문화의 원류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일본의 다이와(大和)정권이 등장한 5세기 후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 이전엔 일본 문화가 마한과 관계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백제가 남하하면서 마한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백제에 쫓겨난 마한인들은 남쪽의 마한이나,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해석했다. 백제의 마한 병합이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임교수는 3세기 후반, 4세기 후반, 6세기 후반 세 차례에 걸쳐 양이부호, 조족문토기, 분주토기등 마한의 토기들이 일본에 파급된 것은 마한의 남하과정에서 이주민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라고 설명했다.

영산강 유역의 전남지역은 마한의 마지막 영역이었다. 이 곳은 6세기초까지 백제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국문화를 수용하고, 고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영산강 유역이 한중일 해상 교류의 삼각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에 힙입은바 크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동북아 해상교육권을 차지한 것도 호남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확용한 것이다.

나주시 반남고분군, 복임리고분군, 영암군 시종고분군, 함평군 예덕리 고분군등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일본식 장고형 고분(전방후원분 고분)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 지역이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게 임 교수의 지론이다.

 

▲ 해남 안호리 1지점 - 옹관묘와 출토유물 /문화재청
▲ 해남 안호리 2지점 - 토광묘와 옹관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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