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에 멈춘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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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에 멈춘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15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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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일본, 미국에 의해 꼭두각시 노릇하다 이국 땅에서 생을 마쳐

 

바오 다이.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다. 한자로 保大 또는 保大帝라고 한다.

그는 베트남의 역사에 두 번의 국가원수직을 맡았다. 첫 번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명목상인 베트남 황제(1926년 1월 8일~1945년 8월 25일)에 올랐다가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민에 의해 퇴위했다. 두 번째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후에 남부의 베트남 주석(1949년 6월 13일~1955년 10월 26일)을 맡았다가 고딘 디 엠 대통령에 의해 쫓겨났다. 비운의 황제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에 의해 꼭두각시 노릇하다가 이국 땅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다.

 

▲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타이와 황후 /위키피디아

 

그가 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가 차던 롤렉스 손목시계가 경매시장에서 약 57억 원에 팔렸다는 뉴스와 함께….

외신에 따르면 경매전문업체 필립스가 지난 13일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바오다이 롤렉스' 경매 결과 8분만에 506만427달러(56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예상 낙찰가격 150만 달러(16억9천만 원)의 3배를 뛰어넘은 것으로, 롤렉스 손목시계의 경매 사상 최고가라고 한다. 이번에 팔린 시계는 검은 눈금판이 있는 롤렉스 3개 모델 가운데 하나로, 시간을 가리키는 일부 숫자 밑에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았다.

 

바오 다이는 1913년 10월 22일 베트남 응우엔(玩) 왕조의 12대 황제 카이딘(啓定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13살의 나이에 안남국 황제에 올랐다.

▲ 황태자 시절 /위키피디아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고, 프랑스는 옛 베트남을 3등분해 남쪽은 코친차이나로 직할령으로 두었고, 북쪽은 통킹, 중부는 안남으로 보호령으로 두었다. 바오 다이는 프랑스의 보호 하에 안남국 2대, 응유엔 왕조의 13대 황제로 오른 것이었다.

바오 다이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는 즉위 직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2년에야 돌아왔다. 귀국후 코친차이나 출신의 기독교도 완유씨란(阮有氏蘭, 南芳皇后)과 결혼했다.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프랑스의 감시 하에 할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연합군에 의해 붕괴하고 인도차이나에도 권력 공백이 생겼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바오 다이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약속하고 협력을 구했다. 바오 다이는 일본에 속았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베트남을 침공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바오 다이에게 제위를 확인하고 독립을 보장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곧이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힘을 잃었다. 일본 제국군대는 마지막까지 버텼다. 하지만 베트남 북부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그해 8월 혁명을 일으켜 베트남을 장악했다. 베트민 정부는 바오 다이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바오 다이는 1945년 8월 25일 보위에서 물러나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망명했다.

 

▲ 즉위식 (1926년 1월 8일) /위키피디아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과 다시 진주한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1954년 8월)이다. 이 와중에 바오 다이는 1949년 베트남에 귀국해 남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합쳐 수립한 베트남국의 국가주석에 올랐다. 제위에서 물러난지 4년만에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배경이 된 프랑스는 1954년 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직후 제네바 협정에서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종전이 선언되고 총선거를 전제로 프랑스가 물러났다.

이번엔 미국이 다시 들어왔다. 미국은 베트민을 공산주의자로 보았고, 중국에 이어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트남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바오 다이는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고, 민심 이반은 극에 달했다. 바오 다이는 친미적인 응오 딘 디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곧이어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고 딘 디엠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바오 다이는 주석 직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미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1955년 베트남 국민투표에서 디엠은 대통령제를 물었고, 그 결과 디엠이 승리해 베트남은 공화제로 이행하면서 국가주석제를 폐지했다. 바오 다이도 황제나 다름없는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국가주석에서 퇴진한 후 그는 곧바로 프랑스에 망명했다. 그후 1972년 프랑스 여성 모니크 보도와 결혼해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와 칸에서 여생을 보냈다.

 

▲ /위키피디아

 

바오다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향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고, 이에 민심이 이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식 황후 이외에도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왕국 시절 수도인 중부 후에 지역에 지지세력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으며, 베트남의 중립 평화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북부 베트남은 파리에 사절단을 보내 바오 다이와 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베트남 통일후인 1992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귀국하지 않고 1997년 7월 31일 프랑스 파리 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도 파리의 한 공원묘지에 있다. 향년 84세.

 

이런 비운의 히스토리를 배경으로 경매에 나온 시계는 '바오 다이 롤렉스'로 불리웠다. 시계는 2002년 바오다이의 친척이 경매에 내놓으면서 관심을 끌었다. 그가 1954년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제네바에 갔다가 산 것으로 알려졌다. 제네바 회담은 베트남에 일시적인 평화르 가져다 주었지만, 바오 다이는 롤렉스 시계를 산뒤 1년후에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 파리의 무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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