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해 봉황동 발굴 선박
이 배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영남문화재연구원) 결과 A.D3-4세기로 추정하며, 배는 녹나무로 만들었으며 선박의 부재의 길이는 390cm 폭은 60cm 두께는 2-3cm정도이다. 노는 120cm 정도로 상수리나무로 만들었으며, 닻은 구멍 뚫린 현무암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왜의 배라고 추정한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에도 5세기 이전에 <도1-22> 호암미술관의 평저선 주형토기와 같이 판자를 이용한 평저형 선박도 보이나 유물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이 선박도 판자를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아 톱과 같은 연모의 발달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김해박물관이나 고령박물관의 많은 철 기구 중에서 톱의 유물을 찾을 수 없었다.
5. 맺음말
우리나라 고대 선박의 발달은 왜의 선박과 비슷하게 발달하였다.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철을 다룰 줄 알고 철과 철 기구들을 수출하면서 주변국들 보다 무기와 선박과 관련된 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아쉽게도 6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나라가 크지 못하여 이웃 나라인 신라와 백제의 침범을 자주 받아 6세기에는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가야철이 왜에 전하여 지면서 왜와는 자연스럽게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주변국의 침범을 받아 고향을 떠나는 유민들은 왜로 많이 흘러갔다.
왜는 한반도에서 문물들을 받아들였으나, 왜가 강성해지면서 한반도의 물자와 백성들을 노획하여 갔다. 특히, 대마도는 식량이 부족한 관계로 수시로 한반도의 전 해안을 누비며 침범하였다. 이런 가운데 왜는 선박의 발달이 한반도 국가들 보다 빨랐고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왜병이나 왜구들은 신라 및 가야를 수시로 침범하여 식량과 백성들을 노획하여 갔다. 신라에서는 왜구의 본거지를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선박 제작 및 수전에 약하여 포기한 적이 두 차례나 있었다.
왜는 섬나라이므로 선박은 필수적인 운송수단이어서 우리 보다 앞 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 보다 산림이 많고 기후가 좋아 삼나무 등의 선박 재료를 구하기 쉽다. 또한 시모노세키에서부터 오사카에 이르는 세토 내해는 지중해와 같은 역할을 하여 선박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태풍, 지진,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로 선박의 해난사고가 많아 제례용 선박도 등장하였다.
주형토기에서 보여 지는 선박은 제례용 선박이라 일반 선박과는 차이가 있지만 3-5세기의 주형토기들에서 고대선박의 발달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 이후로 갈수록 주형 토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순장 제도가 없어지면서부터 부장품도 줄었을 것이다.
고대선박의 대부분은 원목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는데, 김해 봉황동 119-1 유적지에서 발굴된 선박은 판자로 만들었으며 선박의 부재(측판)를 연결하는 구멍으로 보아 나무못 등의 고도화된 선박 제작 기술을 엿 볼 수 있다. 이 선박은 왜의 선박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톱을 사용하여 판자를 만드는 획기적인 기술을 확보한 것 같은데 선박의 선형, 크기, 제작방법(공법), 도구 등을 면밀하게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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