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튤립이 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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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튤립이 필 때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05.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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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핀 튤립에 이끌려 네덜란드에서의 안타까운 추억을 떠올린다

 

[조병수 프리랜서] 봄 햇살이 제법 따스해졌다. 동네 산책로 옆에 피어있는 튤립 꽃들의 선명한 색깔이 드넓은 쾨켄호프(keukenhof)의 꽃밭을 떠올리게 만든다. 네덜란드에 있는 그 정원의 튤립도 4월하순부터 5월초가 절정이라는데···. 한 폭의 그림 같은 그곳을 처음 가본 것이 영국에 있을 때이니, 어언 30여년 전이다. 세월이 유수(流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면서 기억은 봄바람을 타고 다시 그 꽃밭을 거닌다.

 

▲ <쾨켄호프의 튤립> /사진=조병수

 

2000년 4월 초, 모시던 은행장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번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국제금융협회(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 회의에는 실장이 같이 가도록 하자"고 했다. 그렇게 2박3일간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서 다시 네덜란드 땅을 밟게 된다.

현지에서 헤이그의 회의장까지 안내하고 돌아갈 예정이던 런던지점장이 "네덜란드주재 대사가 이번 IIF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분들을 위해서 만찬을 준비했으니, 대사관저로 오라는 연락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한국인은, 1990년대 중반에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했던 분과, 두 달 전에 IIF운영위원이 된 한빛은행장과 나, 그렇게 세 사람 뿐이었다. 그 말을 듣던 은행장이 “지점장도 회의에 같이 참석하도록 하라’고 해서 4명으로 늘었다.

만찬이 약속된 날, 오후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은행장이 “장소가 대사관이 아니고 대사관저(官邸)이니 착오가 없도록 확인해 두라”고 했다. ‘참 꼼꼼하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지차량 편을 준비하고 있는 지점장에게 "기사더러 장소가 관저임을 재확인해달라"며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니 "분명히 이야기했다"고 했다.

 

그때 헤이그에서 처음으로 본 내비게이터가 달린 차를 타고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서, 마당이 쾌 넓은 커다란 주택 같은 곳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에 큰 태극기가 걸려있는 것이 이상했다. ‘대사관저에 대형 태극기라니···?’ 게다가 어찌된 셈인지 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려보아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이리저리 찾아서 들어가 보니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여기는 대사관이고, 관저는 차로 한 30분 정도 걸리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관저 위치를 물으니, 마침 자기가 관저 인근에 살고, 막 퇴근 하려던 참이니 같이 타고 가며 안내해 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전화연락을 하더니, "염려 말고 천천히 오라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지만, 다시 관저로 가려면 약속시간에 늦어지는 결례를 범하게 되었다. 그 분이 사무실에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관저의 위치도 모르고 온통 더 난리가 났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사관 직원이 앞에 타고 뒷자리에 세 명이 끼여 앉았다. 싸늘한 정적만이 차 안을 휘감는 가운데, 얼굴 빛이 변한 채로 말없는 상사(上司)옆에서 몸을 부대끼고 있으려니까, 그 20여분의 시간은 왜 그렇게도 더디게 흐르는지···.

지금까지도 그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모른다. 현지인 기사에게 “관저(residence)라고 했는데 왜 대사관(embassy)로 갔느냐?”고 물어봐도 "주소를 그렇게 받았다"는 답 뿐이었다. 지점장도 말없이 앉아만 있고, 나 또한 뭐라고 남 탓할 형편도 아니었다. 

일껏 재확인까지 시켰는데도 그랬으니, 대사관직원 앞에서 화도 못 내고 심화(心火)를 삭히는 은행장을 볼 면목이 없었다.

다행히 약속시간보다 한 10분 정도 늦어진 것으로 큰 실례는 면했지만, 외부인사와의 약속에 그런 어설픈 모습을 보인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인사를 나누고 아담한 방에서 식사하며 환담하던 중에, 대사가 외국인의 예를 들면서 "혼자서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분명 혼자 참석한 전직고관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늘 그런 기조를 유지하다가 이번에는 직원훈련 삼아 예정에 없던 지점장까지 참여시킨 은행장 입장에서는 조금 머쓱해질 수도 있는 그런 발언이었다.

그냥 듣고만 있기가 조금은 불편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아무 말 않고 주는 밥만 얻어먹고 돌아왔다. 그 날은 정말 뭔가가 마음대로 안 되는 날이었다.

 

그때 헤이그에서 IIF 주최로 열린 “참가회원을 위한 만찬”에서,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 여럿이 몰려와서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었다. 비록 좌장(座長)의 움직임에 따라 우르르 몰려나가는 모습이 그리 매끄럽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국제환경을 배우고 익힌 것이 그들의 미래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시장에서 강화된 그들의 위상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열린 각종 금융관계회의나 세미나에 가보면 한국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어도, 인도와 중국계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 나라가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혹자는 우리 금융기관들의 해외영업활동에 대해 “해외에 나가서 교포들이나 한국계 회사들을 상대로 우리들만의 리그를 벌이다 오는 것 아니냐”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게, 실효성 있게 사람들을 키우는 데 더 많은 투자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사진=조병수

 

길가에 피어있는 튤립의 화사한 색감(色感)에 이끌려서 또다시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해보았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데, 봄내음 맡으며 잠깐이나마 풍차와 튤립의 고장을 넘나들 추억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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