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알고보니 청동기 때부터 중시되던 곳
상태바
한산섬, 알고보니 청동기 때부터 중시되던 곳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4.27 2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때 신호소로 활용…이순신, 전략적 가치 활용

 

경남 통영의 한산섬은 이순신 장군의 최대전승지인 한산대첩의 장소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1592년 (선조 25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연합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적선 70여척과 사워 승리했다. 이 전투 이후 일본 수군은 전멸상태에 들어가 조선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했다. 한산도는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달밝은 밤에…’라는 시조로의 지명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 발굴팀이 이 한산섬의 봉수대를 발굴해 보았더니, 임진왜란에 앞서 청동기 시대부터 제사 유적지로 활용되었고, 이제시대엔 일본군이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신호소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법인 경상문화재연구원(원장 노태섭)이 통영 한산도 망산봉수대를 발굴한 결과, 청동기 시대엔 해안 제사유적이 있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있던 당시에는 삼도수군통제영 관할하의 봉수대 시설로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러일전쟁 때 일본이 사용하던 신호소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통영 한산도 봉수대는 한산도의 정상인 해발고도 293.5m의 망산(望山)에 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 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동안은 성격이 모호한 상태였다.

 

▲ <망산봉수대 건물지 전경> /사진=문화재청

 

이번에 망산 정상부에 있는 봉수대의 내부를 조사했으며, 이 안에서 간돌검(磨製石劍, 청동기 시대 대표 석기) 1점이 들어있는 수혈(竪穴, 구덩이)을 찾아냈다. 이 수혈은 부안 계화도유적, 여수 세구지유적, 서천 옥북리유적 등과 같이 풍어(豐漁)와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이 이루어진 청동기 시대 해상 제사유적으로 파악되었다.

망산의 정상부에 축조된 연조(煙竈, 불을 피워 연기나 횃불을 올리던 굴뚝)는 기반암을 凹자형으로 굴착하여 만든 수혈식이며 평면 형태는 원형이다. 조선 시대 봉수체계는 5개의 연조로 이루어진 신호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현재 4개소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1개소가 더 나올 가능성이 높으며, 당시 봉수의 신호체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 동안 한산도 망산봉수대는 정확한 문헌기록이 없어 주민의 전언 등을 통해 한산도 옛 진영인 통제영이 설치되었던 시기에 운영되었던 봉수대로 알려졌으나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봉수대 내에서는 러일전쟁과 관련된 신호소도 확인되었다. ‘신호소’란 해상감시, 선박과 교신, 기상관측, 인접 신호소, 통신소와 연락을 하는 곳이다. 신호소 내부에서는 당시 일본 규격의 붉은 벽돌과 석탄, 일본자기 완(碗), 시세이도사 제품인 크림치약 용기 등이 나왔다. 벽체와 지붕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 군부가 봉수대 관련시설을 신호소로 급조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한산도 망산봉수대는 한 장소에서 청동기 시대 제사유적, 조선 시대 봉수의 핵심시설, 러일전쟁 시 일본 군부가 사용한 신호소 유적이 골고루 확인되어 한반도 주요 군사시설의 상징적인 장소로서 역사적·지리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평가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