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⑦…망국의 쇼타이(尙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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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⑦…망국의 쇼타이(尙泰)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2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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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뺏기지 않으려 청나라에 밀사 보냈지만, 리훙장 끝내 외면

 

쇼타이(尙泰)왕.

제2쇼씨 왕조의 19대 왕이자, 류큐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본토로 끌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왕이다. 450년 왕실의 종묘사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류큐 영토를 일본의 일개현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본의 술수에 그는 왕위를 내놓아야 했다.

쇼타이왕의 폐위와 류큐국 병탄은 일본이 제국주의 팽창을 시도하는 과정의 첫걸음이었고, 그 다음 순서는 조선이었다. 임진왜란 때와는 반대방향이다. 300년전 일본은 조선을 먼저 침공해 실패한 연후에 류큐를 침공했지만, 이번엔 그 역순을 선택했다. 손쉬운 곳을 먼저 먹은 다음에 보다 큰 것을 먹고, 그다음은 만주, 중국 본토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패배 이후 내치에 주력했던 에도 막부는 조슈(長州), 사쓰마(薩摩), 도사(土佐) 번의 존왕양이(尊王攘夷)파에 의해 타도되고, 명맥만 유지해오던 천황이 서남웅번(西南雄藩)에 의해 떠밀려 나왔다. 1868년의 메이지(明治) 유신이다.

유신의 주도세력은 류큐의 실정과 중요성을 잘 아는 사쓰마 출신이라는 게 비극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사미치(大久保利通) 등 두 주역이 모두 사쓰마 출신이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유신이 성공한후 일본의 팽창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어디를 먼저 침공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했다. 사이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처럼 조선을 먼저 정벌하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고, 오쿠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처럼 류큐를 먼저 내지화해야 한다는 류큐 병탄론을 펼쳤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사이고가 실각했다. 오쿠보의 힘을 얻은 것이다.

1871년 8월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를 발표했다. 막부 시절에 지방에 할거하던 번(藩)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하는 내용의 행정개혁이다.

이어 1972년 오쿠보는 류큐에 메이지 축하사절단을 도쿄로 파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아울러 류큐왕은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일본 귀족과 동등한 자격을 부며, 국왕을 번왕으로 격하한다고 통보했다. 류큐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본의 일개 번(藩)으로 강등한 것이다.

아무리 힘 없는 왕이었지만, 쇼타이왕은 거부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쇼타이의 류큐국왕으로서의 재임기간이 1848년~1872년이고, 류큐 번왕 기간이 1872년 10월~1879년로 기록돼 있다. 일본인들의 자료에 따른 것이다.)

곧이어 1884년 류큐 주민들의 대만 조난 사건이 드러나 일본이 중국령 대만을 침공하고, 청나라가 류큐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은 더 이상 류큐 왕실을 존치시킬 필요가 없게 됐다.

1875년초 오쿠보는 류큐 정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세 정승(삼사관)을 도쿄로 불러,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지만, 정승들은 돌아가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자 그해 7월 오쿠보는 내무대신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했다. 마쓰다는 오쿠보의 심복으로, 독립국 류큐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데 총대를 맸다. 조선으로 치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쯤 되는 인물이다.

마쓰다는 류규국에 대해 10개 조항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청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말 것 ②류큐 번왕(국왕)이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한다 ③메이지의 연호를 따를 것 ④일본 형법을 따를 것 ⑤내정개혁 ⑥청의 연호를 따르지 말 것 ⑦류큐 번왕의 섭정을 둘수 없다 ⑧중국 푸저우(福州)의 영사관을 폐지하고, 류큐의 무역을 일본 영사관 관할하에 둔다 ⑨번왕이 직접 도쿄로 와 천황을 알현한다 ⑩일본은 류큐에 군대를 둘수 있다.

한마디로 나라를 내놓으라는 얘기다. 이른바 ‘마쓰다 10개 조항이’이 공포되자 류큐 주민들이 격분했다. 슈리성의 백성들은 마쓰다가 머무는 숙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즉시 류큐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마쓰다는 두달여 류큐에 압력을 넣었지만 의외로 강한 저항을 받아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정부는 곧바로 류큐 선박이 중국에 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 류큐국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왕. /위키피디아

 

쇼타이왕은 6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 쇼이쿠(尙育)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형이 일찍 사망한데다, 부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국정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채 등극했다. 그는 어려서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무는 정승들(삼사관)에게 맡겼다. 일본이 나라를 집어심키려고 할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쇼타이왕으로선 의지할 곳이 중국 밖에 없었다. 450년간 조공을 바치며 모셔온 중국이 일본으로부터의 압력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쇼타이는 청나라에 밀사를 보내기로 했다.

1876년 12월 세명의 밀사를 태운 배가 푸젠(福建)성으로 떠났다. 밀사는 向德宏 林世功 蔡戴程이었다. 이들을 실은 배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몇 달째 동중국해 바다를 헤메다가 1977년 4월에 중국 해안에 도착해 푸젠성 순무에게 일본이 조공을 방해하며 류큐를 지배하려 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아달라는 내용의 국왕의 밀서를 제출했다. 류큐왕의 밀서는 곧바로 청 조정에 전달됐다. 당시 청의 실세는 리훙장(李鴻章) 북양대신이었다.

리훙장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중국의 주적(主敵)은 러시아였다. 청국은 가까스로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력 소모가 심했고, 러시아가 흑룡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밀려 들어왔다. 리훙장을 중심으로 한 양무운동파는 외부와의 전쟁보다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일본은 바다 건너의 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 300년 가까이 직접적인 위협이 약했다. 오히려 집권세력 내에선 ‘일본과 연대해서 러시아에 대항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그들에겐 국토는 육지를 의미했고, 방어는 지상에서의 방어만을 생각했다. 바다건너 조공국 류큐를 구하기 위해 함대를 보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리훙장의 결론은 류큐 포기였다. 앞서 일본의 대만 침공에서도 청나라는 해상에서의 세력방어에 속수무책임을 보여주었다.

세 밀사가 상국 청나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들은 한편으론 배신감을, 다른 한편으론 절망감을 느꼈다. 향덕굉과 임세공은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해 북양군의 본진이 있는 텐진(天津)으로 갔다. 그들은 리훙장의 관저 앞에서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 일본인으로 살수 없고, 죽어서 일본의 귀신이 될수 없습니다. 대청제국은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주십시오.”

두 밀사는 단식을 하면서 멸망의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해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울부짖었지만, 리훙장 관저의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일주일째 되던날, 임세공은 머나먼 남쪽 나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후 단도를 꺼내 자결했다.

(을사늑약 이후 1907년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세명의 밀사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회회의에 특사로 파견해 주권회복을 호소했지만, 어느 나라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준 열사는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순국했다. 류큐의 모습은 조선이 후에 겪는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 류큐 처분관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 /위키피디아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다. 1879년 3월 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전환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쇼타이왕의 퇴위일은 이날이다.)

이어 일본 정부는 마쓰다 미치유키를 류큐 처분관으로 임명해 500명의 군사를 주어 류큐로 급파했다. 마쓰다가 류큐에 도착한 날은 3월 27일. 일본군은 무력으로 슈리성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고 포고했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왕 쇼타이와 왕자를 비롯, 왕족들을 도쿄로 압송했다. 이로써 450년 류큐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쇼타이는 3월 30일까지 류큐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5월 27일 수행원 96명과 함께 오키나와를 떠났다. 6월 17일 도쿄 황궁에서 메이지 천왕을 접견한 이후 그는 도쿄에서 사실상 유폐됐다.

류큐 왕족들은 일본 귀족(華族)으로 편입돼 쇼타이는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고, 도쿄에서 류큐 국왕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그는 도쿄 상류층 생활을 하면서 류큐의 쇼씨 왕가와 관련된 이권 사업에 간여했다. 1887년엔 오키나와의 구리광산 개발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오사카에 ‘마루이치 쇼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오키나와의 물산을 거래하는 사업을 했다. 일본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단 한번 오키나와 방문을 허용했다. 1884년 슈리의 쇼씨 왕가의 무덤인 타마우둔(玉陵)을 참배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1901년 8월 19일, 그는 5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슈리의 쇼씨왕가 무덤 타마우둔에 묻혔다. 일본 정부는 류큐 왕실의 전통 절차에 따라 2년간 그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허용했다.

▲ 오키나와 타마우둔(玉陵)에 있는 쇼타이왕의 무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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