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⑥…허울만 남은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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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⑥…허울만 남은 왕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2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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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류큐서 수탈한 경제적 이득으로 막부에 대항…메이지 유신의 원동력

 

류큐(琉球) 열도엔 통일후 180년간 한번도 전쟁이 없었고 국왕의 군대는 워낙 수가 적었다. 그 기간에 큐슈 사쓰마(薩摩) 군대는 다이묘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와 일본의 조선 침공(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강군이 되었고, 류큐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쓰마의 침공으로 일본 본토에 압송됐던 류큐의 쇼네이(尚寧) 국왕이 2년반의 갖은 수난을 겪은후 1611년 귀국했지만, 나라는 속국이 되어 있었다. 사쓰마와의 조약에 의해 왕의 지위는 되찾았지만, 사쓰마에서 파견된 감독관에 의해 왕실의 모든 것이 통제되고 감시를 받았다. 류큐국은 사쓰마의 시마즈(島津)씨의 완전한 속령(屬領)이 되었고, 류큐 왕실은 시마즈씨의 가신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에도(도쿄)의 도쿠가와 막부나 시마즈씨가 류큐가 독립국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예컨대 시마즈씨는 류큐가 일본식 풍속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고, 중국 사신이 슈리성을 찾을때엔 사쓰마의 감독관이 나하를 떠나 피신해 있었다. 또 막부의 쇼군이 바뀌어 류큐에서 사절단을 보낼 때에는 일부러 중국풍의 옷을 입게 하고 사절 일행의 이름도 중국식으로 부르게 했다. 식사예절도 중국식으로 강요했다.

사쓰마가 이렇게 나온 것은 중국을 의식한 것이다. 중국은 이 무렵 조선에서 일본과 싸운 명나라가 쇠하고, 만주의 청나라가 주인으로 등장했다. 어쨌든 조선 땅에서 중국군과 싸워 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막부나 사쓰마가 류큐가 속령인 사실을 중국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중국에게 가급적 들키지 않게 하되, 실질적으로 류큐를 지배하는 수법을 썼던 것이다.

청나라는 말기까지 류큐가 일본의 막부, 또는 사쓰마의 속령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일본의 속임수에 철저히 속았던 것이다. 1847년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尙泰)의 책봉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일본이 사실상 류큐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쓰마의 침공(1609년)에서 형식적인 왕국을 일본에 합병한 류큐 처분(1879년)까지 270년간 류큐국은 형식적으로는 중국에, 실질적으로는 일본에 지배당하는 이중속국으로 전락했다. 일본 역사에는 이 기간을 ‘일지양속(日支兩屬)의 시대’이라고 부른다.

류큐는 예전처럼 중국에 예전처럼 조공을 보냈고,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 하지만 청나라는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조공품의 갑절 이상의 사은품을 내려줬다.

이에 비해 사쓰마의 시마즈씨는 정치적으로 류큐를 지배하면서 경제적으로 수탈했다. 우선 조공무역의 관리권을 빼앗았다. 류큐 왕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걷는 연공미 가운데 30%를 사쓰마가 갈취했다. 또 류큐에서 설탕이 재배되면서 이를 수탈했고, 명주, 상포(上布: 고급 마직물) 등을 싼 가격에 매수하는 형식을 취해 수탈했다.

 

▲ 오키나와의 사탕수수밭 /사진=김인영

 

류큐에는 17세기초 중국에서 설탕제조법이 수입돼 처음으로 설탕이 생산됐다. 설탕은 당시에 매우 귀중한 식품이었다.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살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아열대 기후여서 일찍부터 사탕수수가 재배되는데, 중국에서 기술이 도입되면서 설탕이 양산체제로 돌입했다. 때마침 동양에 진출한 포르투갈·스페인 무역선들이 설탕 맛을 알게된 유럽 귀족들을 위해 설탕을 매집했고, 일본에서도 설탕이 인기를 끌었다. 따라서 설탕이 고가에 팔려나갔다. 덕분에 류큐의 설탕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사쓰마도 일본 열도에서 최고의 상거래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류큐산 설탕을 놓칠리 없었다. 사쓰마가 류큐 왕실을 설탕 수매기관으로 활용했다. 사쓰마는 오사카 시장에서 거래되는 설탕 가격의 절반 값을 류큐왕실에 주고 설탕을 사들였다. 류큐 왕실은 농민들에게서 사쓰마에게 파는 가격의 60% 가격에 수매했다. 결과적으로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보면 사쓰마가 50%, 류큐 왕실이 20%를 챙기고, 농민들에게 돌아간 몫은 30%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이중 수탈구조에 시달렸다. 18세기 이후엔 농민들에게 물리는 연공미를 모두 설탕으로 내게 했다. 설탕 집산지인 아마미 열도에서는 전 농토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바람에 쌀과 생활필수품을 전부 사쓰마에서 사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사쓰마 상인들은 돈을 챙겼다. 쌀과 생필품을 비싸게 팔았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사쓰마번은 설탕 전매제를 실시했고, 류큐에서 생산된 설탕을 전매함으로써 이득을 챙겨 막부에 대항할 경제력을 형성했다. 조슈(長州)와 함께 사쓰마가 메이지(明治)유신의 주체가 된 것도 류큐를 착취해서 얻은 부의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페리제독이 이끈 미국 흑선 함다 /위키피디아

 

19세기 들어 류큐엔 서양 배들이 자주 눈에 띠었다. 유럽과 미국의 군함, 상선대, 포경선 등이다. 1844년과 1866년에 프랑스 군함이 접근해 ①화친 ②통상 ③기독교 포교 등 세가지를 요구했다.

사쓰마와 에도의 막부가 충격에 빠졌다. 류큐의 정치적 실체가 드러날 판이었다. 이때 막부는 애매한 방침을 내렸다. ‘기독교 포교는 허용할수 없으나, 무역은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사일런스(Silence)」에서 보여주듯, 사쓰마(가고시마)는 1549년에 스페인 선교사 사비에르에 의해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이다. 한때 신자가 20만명까지 증가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곧이어 천주교를 탄압했다. 영화에서 보듯 종교는 이념, 곧 정치철학을 건드리는 것이므로, 막부는 류큐에 포교는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무역은 허용했는데, 구미 열강의 통상 압력을 류큐에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류큐는 필요에 따라 속국이 되고, 때론 외국(異國)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 슈리성을 찾은 페리 제독. 1853년 6월 6일. /위키피디아

 

1854년 3월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이 흑선 함대를 이끌고 와서 막부에 통상협상을 요구했다. 페리 제독은 이때 나하항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막부는 이때도 “류큐는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페리는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은후 그해 7월 흑선을 이끌고 나하로 왔다. 류큐는 막부와 사쓰마의 허락을 받고 미국과 별도로 ‘미-류큐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이 1882년 청나라의 허락 하에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과 너무나도 닮았다.

류큐는 이어 1855년 프랑스, 1859년 네덜란드, 1860년 이탈리아와도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겉으로 류큐의 독립을 인정하는 듯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 본색을 드러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대만 파병선 류조호 /위키피디아

 

1871년, 류큐 미야코섬(宮古島) 주민들이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했다. 그들은 일단 대만섬 남쪽의 파완이라는 곳으로 피항해 대만 원주민 거주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체 66명중 54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살아남은 12명은 중국계 주민에게 구조되어 이듬해인 1872년에 송환되었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의 화친 및 개항 요구에 류큐는 독립국이라던 일본이 이번 사건을 기회로 삼았다. 이때엔 일본이 류큐를 자국의 일원으로 표현했다. 메이지정부는 일본국에 속하는 류큐 번민(藩民)을 살해한 대만 원주민을 징벌하라고 청나라에게 요구했다. 청나라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류큐는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그 대가로 하사품을 내려왔는데, 갑자가 일본의 번(藩)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러자 1874년 5월 일본은 3,600명의 군대를 대만에 파견해 공격했다. 원주민 32명이 살해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일본의 행위가 정당한 행위였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근대국가 일본의 첫 해외 출병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근성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는 마지못해 대만 원주민에 대한 일본의 징벌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조난당한 류큐인에 대한 위로금 조로 10만냥을 지불하는 등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통해 류큐가 일본의 영토임을 청국이 인정한 근거로 간주했다. 더 이상 류큐가 속령이라는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됐다. 남은 것은 허울뿐인 류큐 왕실을 없애고 일본과 합병하는 것이다.

 

▲ 1874년 5뤌 일본의 대만 침공시 수문전투 판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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