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철의 나라 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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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철의 나라 금관가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3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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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수출…무역대국

한반도 남쪽의 부족국가 가야는 철의 문화가 꽃 핀 곳이다. 가야는 철의 강국이었다.

한반도의 철은 대륙에서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북한에서는 시베리아 계통의 철기가 유입됐다고 주장하면서 함경도 지방의 유물들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국에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 기원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 중국의 전국시대에 철이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주장으로, 당시 유물은 평안북도 영변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이들 유적은 호미, 낮, 반달칼, 자귀등의 농기구와 창, 화살촉등의 무기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은 한반도에서 철기 문화가 대량 유입되는 단계로, 이때 한반도 전역에 철기가 보급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이 멸망하고 대동강 유역에서 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된다. 대부분 장검, 창, 도끼 같은 무기류다.

그런데 남한의 가야 지방에서도 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고, 역사서에서도 그 기록이 남아있다. 가야는 고대 한반도에 철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지역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철광석은 동광석보다 손쉽게 구할수 있지만, 녹이는데 1,200도 이상의 고온이 필요한 금속이다. 이렇게 생산하기 어려운 금속이 가야지방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

가야의 역사는 베일에 싸여 있다. 나라를 세운 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출신이었다느니, 일본이 그 지방을 통치했다느니 하는 주장들은 그만큼 사료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출통된 유물들을 통해 가야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다.

가야 유적지에서는 철이 많이 발견된다. 경남 성산의 패총 네곳에서 철이 녹아 내린 흔적이 발견됐다. 야철 송풍관과 노지 철재()도 발굴됐으며, 쇳물이 흘러내릴수 있도록 한 경사지 홈통도 확인됐다. 이런 유물들은 이 지역에서 야철이 행해졌음을 입증한다.

▲ 가야의 갑옷
▲ 대성동 철기. 금관가야가 생산한 철제품. /김해시청

문헌에서도 가야에서 철이 대량으로 산출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이렇게 서술한다.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여기서 나라는 가야를 말한다. 삼한은 진한·변한·마한이고, 예(濊)는 강릉, 삼척 일대의 부족국가를 말한다. 즉, 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평양 인근의 낙랑군, 황해도 일대의 대방군, 한반도 남쪽의 삼한 부족, 동해안 부족은 물론 멀리 일본까지 수출됐다는 뜻이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자, 무역대국이었다.

유물 발굴팀에 따르면 경남 다호리 유적에서는 주조한 철기 뿐아니라, 더욱 발전된 단조 기술로 만든 다양한 철기가 발굴됐다. 칼, 창, 화살촉등 무기류와 도끼, 괭이, 낫 등 농기구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이 지역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기 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서 철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무기는 구리보다 뛰어났고, 금새 무뎌지는 청동기보다 강하여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녹이 잘 슬어 장신구로서의 매력은 적었지만, 지배자 집단에겐 철이 매력적잉덨다. 철을 확보한 부족은 주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잉여 생산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삼국시대가 형성되기 이전에 가야가 한반도 남부에 강한 세력을 형성할수 있었던 것은 철의 대량생산 때문이었다.

가야의 건국자 수로왕 전설에서도 ‘철의 왕국’에 관한 의미기 숨어 있다. 수로왕의 성은 김(金)으로, ‘쇠’를 의미한다. 김수로왕의 부족은 철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가야를 지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른바 신라의 왕족 김씨와 함께 가야 왕족도 쇠를 다루는 ‘단야족(鍛冶族)’이었다는 해석이다. 단야족의 수장인 김수로왕은 철의 생산과 활용을 통해 주변 부족을 압도적인 힘으로 지배했고, 나중에 신라왕이 된 탈해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사서에 나온다.

수로왕의 본거지였던 금관가야는 지금의 경남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금관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에는 철기 제품이 많다. 따라서 금관가야는 철로 인해 한반도 남부 지역을 통치했고, 여기서 생산되는 철이 일본과 중국 식민지였던 낙랑과 대방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수출됐던 것이다.

철은 가야를 융성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를 외부의 침략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가야는 철로 인해 승하고, 철로 인해 망한 것이다.

가야의 철을 확보하거나 생산과 교역 조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때로는 ‘반란과 전쟁’으로 확대됐다. 부족 또는 국가의 이해관계가 철의 확보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수로왕이 철의 생산과 교역을 장악하자 주변의 반발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였으리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내해왕 시절에 가야국이 포상팔국(蒲上八國)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포상팔국은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 여덟 부족국가를 말한다. 이들 부족은 김해에 본거지를 둔 철의 왕국이 철 교역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삼국사기』는 가야국이 이웃 신라의 도움으로 포상팔국의 난을 진압했다고 적고 있다. 그만큼 철의 생산과 교역을 두고 가야와 주변국과의 전쟁이 치열했고, 가야는 혼자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이웃 강국의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결국 가야는 이 반란을 계기로 신라에 의지하게 된다.

5세기초 가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광개토대왕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데, 그러면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의 영토를 거쳐 조그마한 가야를 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철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광대한 대륙을 경영하던 고구려가 영토 유지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철이 필요했고, 그러자니 우수한 철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던 가야를 손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마치 독일 제국이 프랑스의 철광석 및 석탄 산지인 알사스, 로렌을 점령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해석도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철의 왕국 가야는 이웃 부족과 고구려, 왜의 잦은 공격 대상이 됐고, 마침내 신라와 백제의 협공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가야의 철 산지는 신라로 넘어가고, 마침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산업적, 군사적 원동력을 얻게 된다. 그러니 신라의 상국을 통일하게 된 힘의 원천이 바로 철산지 확보가 아니었을까.

가야는 철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한반도 남동 해안에 찬란한 문화를 일궈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가야의 주변인 동해안과 남해안에 한국의 철강산업단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만으로 볼수 없을 것이다.

가야 왕국이 한때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 철을 공급하는 기지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철강산업의 역할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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