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터만 남아있는 경희궁(慶熙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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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터만 남아있는 경희궁(慶熙宮)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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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 듣고 지어…서궐이라고도

정부가 대우조선에 3조원의 구제금융을 준다고 발표한 날(3월 23일), 대우조선이 운영해온 '카페 드마린'에서 점심약속이 있었다. 신문로에 있는 이 식당은 팔려 다른 주인으로 넘어갔다.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주차장에는 산수유와 벚꽃이 봉우리를 튀우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20여분 앞서 도착해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근처 경희궁을 둘러보았다.

▲ 경희궁내 숭정문 /사진=김인영

 

경희궁은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고 한다. 창건할대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해 서궐이라 불렸다.

창건 시기는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왕기가 서렸다는 말은 맞은 것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했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사진=김인영

 

경덕궁은 창건 후 70여 년이 지난 숙종 19년(1693)에 중수가 있었다. 영조 36년(1760)에는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정원군의 시호에 쓰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 하여 궁의 이름을 ‘경희’로 고쳤다. 이렇게 바뀐 이름이 줄곧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1820년대 경희궁 전경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당시 120여 채가 넘는 경희궁의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경희궁은 고종 때부터 궁궐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다. 고종 초, 경복궁을 중건하여 그곳을 법궁 삼아 왕이 이어하면서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그러나 경희궁이 급격히 궁궐의 면모를 잃어버리는 것은 20세기 초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일본인 학교인 총독부중학교를 세운다. 이 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경희궁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축소되고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던 궁궐은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 서울역사박문관 입구에 복원된 금천교 /사진=김인영

터만 남다시피 했던 경희궁이 최근 우리에게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해방 이후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섰던 경성중학교터는 1978년 이 학교가 이전하면서 민간기업의 소유가 되었다. 그것을 1984년 서울시가 사들여 경희궁터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는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복원과 재이건 또한 무척 불완전한 것이다. 원위치가 구세군빌딩 어름쯤이었던 흥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시는 경희궁의 복원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경희궁터의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했다. 서울역사박물관 동쪽 입구에 경희궁의 금천교가 복원되어 있다. 예전엔 물이 흘렀지만, 지금은 지금은 물길이 끊기고 썰렁하게 남아 있다.

근처에 「경희궁의 아침」, 「경희궁 자이」등 현대식 주거단지가 형성돼 씁쓸함을 안겨주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주차장의 산수유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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