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㊳ 20세기 세계영화의 한 축 '소련 영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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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㊳ 20세기 세계영화의 한 축 '소련 영화' (상)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9.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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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대척점에 선 소련영화
공산혁명 후 레닌, 영화사업 관한 지침 발표
필름 재활용으로 영상이론 탄생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1917년 11월 7일 20세기 역사의 주인공 중 하나 인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볼세비키 혁명이라 불리는 10월 혁명 끝에 탄생한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였다. 혁명 직후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레닌은 당시 민중들을 계몽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계몽의 수단으로 선택한 건 영화였다. 그는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무지몽매한 민중들을 교육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다.

레닌은 1922년 “영화 사업에 관한 지침”을 발표했고, 이후 소비에트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의 대척점에서 세계 영화 산업을 한 축을 맡게 된다.

영화 강국 제정 러시아의 전통

레닌이 영화를 민중들에 대한 선전 선동 및 교육의 수단으로 생각한 것에는 영화가 문맹률이 높은 하층민에게 유효한 매체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 전달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성공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인 민중들이 같은 뜻과 같은 목표를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신봉했고, ‘충분한 토론과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하면 모든 이들이 이에 따르는’ 모습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레닌은 민중 교화를 위해 영화를 수단으로 사용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로 탄생한 소비에트의 레닌 서기장은 민중 교화를 위해 영화를 수단으로 사용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영화는 레닌의 이러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달성하는 데 주요한 무기였다. 신문이나 책 등의 매체는 전파력이 낮았고 문맹률로 인해 대부분의 무산 계급으로의 메시지 전파가 어려웠다.

소비에트 정부에서 영화를 담당한 부서가 ‘교육(Education) 인민위원회’였던 것만 봐도 영화의 목적성이 분명해진다.

영화를 민중 계몽과 혁명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선택한 볼셰비키였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영화 산업은 ‘산업’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영화를 제작했던 이들이 대부분 ‘자본가’로 불리는 유산 계급들이 많았고, 공산주의에서 배척하는 예술가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혁명 이후 많은 영화인들이 러시아를 떠났고, 이로 인해 소련의 영화 산업은 만들 사람도 만들 자금도 만들 시설도 없는 상태였다.

초기 소련 정부는 제정 러시아 시절 찍어 놓은 필름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다.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는 영화 강국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1896년 프랑스에서 영화가 상영된 지 4개월 만에 영화를 들여왔고, 같은 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대관식을 촬영한 영화가 러시아 최초로 제작되었다.

발레 등의 공연 문화가 성행한 극장의 나라 답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구 레닌그라드) 등에는 영화 상영관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도 같은 해의 일이다.

프랑스나 미국, 독일 등의 해외 영화들이 러시아 시장을 노리고 진출했지만, 러시아 산 영화들의 경쟁력은 막강했다. 100여편이 넘는 러시아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세계 최초로 멀티캠 (두 대 이상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하는 기법) 영화인 ‘세바스토폴 방어전 (1911)’같은 영화들이 흥행하는 등 당시 세계 영화 시장에서 러시아의 지분은 만만치가 않았다. 

                                                                                          세계 최초 멀티캠 영화 ‘세바스토폴 방어전’ (1911)

새로 영화를 찍을 예산이 없던 소련 정부는 이러한 제정 러시아의 유산을 재편집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이고자 노력했다.

옛 필름과 수입한 필름들을 자르고 붙여서 자신들의 정책과 이념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산부족 짜집기에서 탄생한 편집 이론들

예산 부족의 고육지책이었지만, 이러한 ‘짜집기 식’의 초기 소련 정부제작 영화들은 당시 영화 산업에서 큰 비중이 없던 ‘편집’이라는 요소를 부각하게 되고, 이는 이후 현대 영화 아니 모든 영상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 중 하나인 ‘몽타주 이론’으로 발달하게 된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한때 정치적, 이념적 이유로 소비에트 영화는 서방 세계에서 그 지분을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영화사에 있어 소련이 만든 전통은 지금도 영화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영상 산업 전반에 흩어져 있다.

예산부족 짜집기에서 탄생한 편집 이론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예산부족 짜집기에서 탄생한 편집 이론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소련의 영화 이론학자들은 영화에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었고, 빈곤한 소련 정부가 어떻게든 짜낸 예산으로 찍은 ‘아지트카’라고 불리는 선전 선동용 짧은 뉴스릴은 현대 광고 영상이나 마케팅 영상들의 이론적 근거들을 마련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뉴스릴을 새로운 공산주의 사상을 선도하는 선동가들의 손에 들려 전 러시아의 마을을 돌아다니게 했다.

영화라고는 본 일도 없고 여전히 중세에 가까운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깡촌 러시아 마을에 전해진 공산주의 사상과 영화, 이 둘의 조합은 소련의 영화 산업을 할리우드의 그것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고, 점점 소비에트 사상에 동조하는 새로운 영화인들이 나타나면서 소련의 영화 산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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