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외교⑤·끝] 기업인 방북
상태바
[북방외교⑤·끝] 기업인 방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02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공화국 비화> 김일성-김우중 별장서 한 시간 독대

1992년 1월 20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숙소인 평양 인근의 흥부초대소에서 일행인 그룹의 최명걸·윤영석부회장, 석진철 사장, 실무자인 이승영 과장등 일행 8명과 벤츠승용차를 나눠탔다. 30분쯤 달리니 북한 김일성 주석의 별장이 나타났다. 김 회장 일행이 입북한지 닷새째 날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마중나와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김 주석은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김회장 일행을 반겼다. 일행은 별장내 대형접견실로 자리를 옮겨 티타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은 우선 노태우 대통령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나서 남북협력의 역사적 당위성, 책임자의 소명의식등을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풀어나갔다. 30여분간의 간단한 티타임을 가진뒤 김일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시간을 가지라”며 대접견실에 남겨두고 김회장과 소접견실로 옮겨 독대를 가졌다.

김 주석은 북한의 경제현황을 설명하면서 “남측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며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회장도 기탄없이 남북관계, 특히 경제협력관계에 관한 자신의 평소 생각을 털어 놓았다.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에 역점으로 두려는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은 방향을 옳게 잡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측 기업의 대북투자에 있어서 장애요인을 조속히 해결해 주십시오. 북한에는 번지수도 제대로 되지 않아 기업인들이 땅을 이용하더라도 어느 기관에 등기하고 사용권 신청을 해야 하는지 투자환경 조성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김 회장의 이야기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김 회장은 매우 솔직한 사람입니다. 북한이 일시에 전면 개방을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평양 인근에 공단을 설립하기보다는 남포등 대규모 경제특구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개방해 나갈 생각입니다.”

김일성은 이렇게 말하며 남한 측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김 주석은 노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하고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다는 뜻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성과 김 회장의 독대는 한 시간 가량 진행됐고, 이어 이들은 대접견실로 나와 다시 1시간 30여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기념촬영을 한 뒤 헤어졌다.

6공화국 5년 동안은 앞서 다른 어느 정권 때보다 기업인들의 북한행 발걸음이 잦은 시기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장치혁 고려합성그룹 회장, 통일그룹을 이끌고 있는 문선명 목사 등 언론 지상에 오르내린 기업인들은 물론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들 기업인의 방북은 6공화국 정부가 추진해온 포괄적인 북방정책의 범주 내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기업인 방북은 정부내 북방정책 담당자들과의 사전 의견조정 이래 진행됐고,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간첩단사건, 북핵 문제 등 남북간에 발생하는 정치사안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기업인을 앞세운 남북 경제협력은 6공화국 초기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후기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 그 중심점이 옮겨간다.

1989년 1월 23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북한 로동당 서열 4위로 정무위원이었던 허담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 도착했다. 정 명예회장은 방북에 앞서 1월 6일부터 12일까지 첫 소련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다. 그는 북한측 인사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술회했다.

“허담씨는 아주 세련된 신사이고,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정치관계 안내는 전금철씨가 맡았고, 경제관계 안내는 최수길씨가 맡았다. 그들은 북한 인민위원회에 합영법을 통과시킨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북한에도 북한이 세계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숨죽이고 있다.”

북한측이 정 회장을 초청한 것은 금강산 개발 때문이었다. 북한측은 정 회장에게 “돈은 있으니까 기술만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정 회장은 “외국에서 돈을 들여와야 외화를 벌수 있다”고 설득했다.

“자금은 고객을 끄는 법인데 외국사람들이 밑천을 대주어야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남측 자금은 안됩니다.”

“김일성 주석이 남북의 국민을 다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북한측은 김 주석을 들먹이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남한 자금을 들여 금강산을 개발하는데 합의하게 된다.

정 회장은 이어 “남한 정부가 ‘이 사람은 금강산 가는 사람이오’ 하고 스탬프를 찍어 보내면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고 제의했다. 북측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

정 회장은 금강산 개발 외에도 ▲원산 철도차량 공작창에의 기술제공 ▲수리조선소의 도크 건설 ▲시베리아 코크스공장 건설 ▲소련내 암염(巖鹽) 개발등 5개항에 대한 합의의정서를 체결했다.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들러 친척들을 만나고 열흘만에 돌아온 정 회장은 청와대를 방문, 박철언 정책보좌관에게 방북 결과를 협의했다. 정 회장의 방북은 박 보좌관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인연으로 박철언씨는 나중에 정 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에 입당한다.)

 

박정희 정부, 극비리에 금강산 개발계획 추진

사실 남북한이 공동으로 금강산을 개발하는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추진된 프로젝트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만들어진 당시 ‘금강산-설악산 관광도로 구상’이라는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이미 1972년에 금강산 지역에 대한 토지이용과 도로망계획, 개발추정 비용등을 망라한 금강산 개발계획을 극비리에 수립했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우리 기업이 들어가 개발하기로 합의한다는 소식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민간 베이스의 기업인을 초청하면서도 정부 차원의 경제협력에는 거리를 뒀다.

정 회장이 평양에서 금강산 개발을 협의하고 있을 때 스위스의 휴양도시 다보스에서는 세계경제 지도자회의가 열렸다. 우리측에서는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북한에서는 채희정 합영공업부장이 각각 참석했다. 평양에서는 거물급 기업인이 남북경제협력을 논의하고 있는 마당에 남북한 경제각료들의 첫만남은 그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1월 27일 밤 다보스시 콩그레스하우스에서 열린 개막 리셉션장. 두 사람은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회동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덕담이 오가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15분간 진행됐다. 그뿐이었다. 남북한 경제협력이라든지, 남한 자본의 유치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조 부총리가 두 대표가 만나 격의 없는 대화를 갖자고 제의했지만 채 대표는 완곡히 거절했다. 정부 채널의 접촉을 피하려는 북측의 의도가 역력했다.

그후 강영훈 국무총리, 조순 부총리, 이홍구 통일원장관등 정부 각료들이 정경분리를 통한 남북합작사업이 어렵다는 부정적 발언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 터지고 정 회장의 방북 성과는 무산됐다. 1990년 5월 16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금강산공동개발계획등 현대그룹과 맺은 사업계획을 취소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1991년 11월 30일 종교인이자 통일그룹을 이끌고 있는 문선명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 12월 5일 김달현 부총리와 만나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했다. 문 목사는 ▲두만강 선봉지구 개발 ▲원산 경공업기지 건설 ▲금강산 합작개발등에 합의했다. 그리고 12월 13일 서울 셰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측의 정원식 총리와 북의 연형묵 총리가 역사적인 ‘남북합의서’에 서명, 정부 차원에서 남북경협의 물꼬를 튼다.

그동안 비밀리에 몇차례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김우중 대우그릅회장은 남북합의서 서명이 이뤄지자 공식적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1991년 1월 김 회장은 열흘간의 평양 방문을 통해 ▲남포에 전용공단 개발 ▲경공업 12개분야 합작공장 설립 ▲북한내 지하자원 공동개발 등에 관해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어 장치혁 고려합섬그룹 회장이 92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북한을 방문한다. 평안도 영변 출신인 장 회장의 방북은 동향인 임동원 통일원 차관이 다리를 놓아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 회장은 헬기를 타고 고향을 돌아보기도 했고, 선봉지구에 폴리에스터 공장과 직물염색가공공장 합작건설에 합의했다.

그러나 6공화국 말기에 접어들면서 북한 핵문제가 한-미, 미-북간에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기업인의 방북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느니 마느니 하던 대우그릅의 남포공단조사단은 예정보다 두어달 늦은 1992년 10월초 북한을 다녀왔다. 이어 대형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북한행 기업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남북 경협은 차기 정부의 북한핵문제등 정치사안이 해결되는 것을 전제로 잠정 유보상태에 들어갔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