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㊱ 독일 표현주의와 현대 콘텐츠 산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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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㊱ 독일 표현주의와 현대 콘텐츠 산업 (상)
  •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승인 2021.08.2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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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 직후, 전세계 상영영화 90% 미국서 제작
독일, 1916년부터 미국영화 상영금지 조치
독자적 영화 산업 육성이후 독일식 표현주의 등장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1930년대 세계 영화 시장이 미국 특히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질적인 영화의 종주국이며 한 때 세계 영화 산업을 이끌었던 유럽이지만 1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 속에서 유럽의 영화 산업은 성장할 수가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만 하더라도 장편 영화 제작 편수나 영화관 수가 미국을 압도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이 비중은 역전이 되었다. 영화 필름을 제작하는데 쓰는 셀룰로이드 재료가 화약을 만드는 재료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필름보다는 화약이 우선인 전시 상황때문에 영화 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환경이 아니었기에 많은 영화인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영화 자본 역시 미국을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 ‘강점기’

당시 세계 영화 시장에서의 미국 종속 현상이 얼마나 심했나 하면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상영된 영화의 90%가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였다.

자국 영화 산업이 전무하다시피 한 남아메리카의 경우에는 거의 100%로 이런 미국 시장 의존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전 세계가 미국 영화로 도배되던 그 시절 미국 영화의 영향력이 거의 닿지 않던 이른바 ‘미국 영화 청정지역’이 전 세계에 딱 두 곳이 있었다. 바로 독일과 소련이었다. 

소련은 당시 레닌에 의한 러시아 혁명이후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미국 영화를 차단했다. 영화 자체를 정치적 선전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상징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한 장면.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상징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한 장면.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916년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당시 적대국이었던 미국 영화를 포함한 외국 영화를 정부에서 금지시켰다.

이 조치는 독일 영화 산업을 국내외 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후 독일 영화 산업은 미국 영화를 배제한 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미국 영화 수입이 금지된 이후 콘텐츠 부족 현상에 시달린 독일 영화계는 자체적인 영화 수급에 몰두하게 된다. 결과 전쟁 전부터 있어왔던 4년 24편에 불과했던 영화제작편수는 4년 뒤 무려 130편으로 6배 가까이 늘어났다.

종전 이후 패전한 독일은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전후 배상금과 영토 할양 같은 굴욕적인 조치를 당하지만, 별개로 고립되었던 영화 산업은 자체적으로 성장해 독일 특유의 영화 사조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 표현주의 (Germany Expressionism)다.

독일 표현주의는 종전 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기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불렸던 짧은 공화정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명 ‘골든 트웬티 (Golden Twenties)’에 형성된 독일 특유의 영화 사조라 할 수 있다.

골든 트웬티의 시대

역사적으로 볼 때 골든 트웬티는 상당히 독특한 시기로 평가된다. 종전 후 독일은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본 딴 일련의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거쳐 공화정을 선포한다.

헌법이 선포되고 국회가 구성되지만, 곧 승전국들에 의해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과 군비 축소 등이 강요되며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독일 경제를 지탱하던 철광과 석탄 산업이 붕괴되고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화폐를 찍어 낸 결과 역사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 불리는 상상 초월의 인플레이션이 독일을 덮쳤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상징적 사진, 지폐다발로 벽돌쌓기 놀이를 하는 독일 아이들 .출처=위키피디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상징적 사진, 지폐다발로 벽돌쌓기 놀이를 하는 독일 아이들 .출처=위키피디아.

장작보다 돈이 쌌기에 돈 뭉치를 불태워 난방을 하고, 빵 한조각을 사기 위해 수레에 돈을 싣고 가는 말도 안 되는 풍경들이 연출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 혼란이 오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위기의 해’로 불린 1923년 수상 겸 외무 장관으로 임명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탁월한 외교 덕분에 독일 경제는 급속도로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고, 독일 화폐의 신용도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24년 슈트레제만이 주도하여 배상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일명 도스 플랜 (Dawes Plan)이 체결되며 독일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5년간의 베를린 황금기가 불리는 골든 트웬티가 시작된다. 이 시기 독일에서는 독일 표현주의 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골든 트웬티 시절의 베를린, 당시 독일인들에게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재를 즐기자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런 풍조는 이후 나치즘이 성장하는 훌륭한 토양이 되었다. 출처=위키피디아.
골든 트웬티 시절의 베를린, 당시 독일인들에게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재를 즐기자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런 풍조는 이후 나치즘이 성장하는 훌륭한 토양이 되었다. 출처=위키피디아.

독일 표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골든 트웬티의 독특한 사회적 배경을 먼저알아볼 필요가 있다. 전제군주가 퇴위되고 갑작스럽게 공화정이라는 정치 체재를 맞이하며 불어닥친 자유주의의 물결과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상상을 초월한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경제 붕괴를 겪은 독일인들의 의식은 그야말로 집단적인 ‘멘붕’ 상황이었다.

미래를 담보할 수 없고 매일같이 물가가 뛰는 상황에서 현금을 가지고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바로 써버렸고, 그러한 독일인들이 선호하는 소비 문화 1위는 술과 유흥이었다.

술집과 클럽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로 흥청거렸고, 파리 물랑루즈 스타일의 베를린 곳곳에 널린 카바레에서는 젊은 여성들의 스트립쇼가 연일 이어졌다.

그야말로 퇴폐와 쾌락주의가 만연한 시기였다. 지식인들과 창작자들 역시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직후의 어두움과 혼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은 스크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지금의 각종 공포 장르와 느와르 필름이라 불리는 모든 장르의 원형이 됐고 이러한 표현주의의 전통은 현대 영화 산업에 있어 가장 영향력을 가진 장르들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 (다음편에 계속)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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