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⑱ 업황 넘어서는 항공산업 리더, 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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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⑱ 업황 넘어서는 항공산업 리더, 보잉
  • 이영원 미래에셋증권 이사
  • 승인 2021.07.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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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원 미래에셋증권 이사] 비행기를 제조하는 항공기 산업은 항공운수산업과 함께 코로나19의 경제적 충격을 직접적으로 받은 산업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사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은 코로나19 충격으로 지난 2019년말 주가에 비해 2020년 3월 저점까지 무려 79% 주가가 하락했다. 항공기 제조업의 대표주자인 보잉도 코로나19 충격으로 2019년말 대비 2020년 3월 저점까지 72% 주가가 하락했다.

두 종목 모두 이후 꾸준한 회복을 보이고 있고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면서 경제 재개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는 가운데 저점에 비해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은 현재 약 2.9배, 보잉은 약 2.6배 주가가 상승했다.

하지만 여전히 2019년말 수준까지 회복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보잉의 경우에는 2019년 고점의 1/2를 조금 넘은 정도의 주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경기에 민감하고 산업 내부의 경쟁과정에서 업황의 부침이 심하게 나타나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항공기 산업은 대규모의 기업합병, 인수 등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잉은 그 중에서 성공적인 경영전략으로 현재 유럽의 에어버스와 민간항공기 시장을 양분하고, 군수시장에서는 록히드 마틴과 시장의 최강자 지위를 겨루는 대형 항공기 제조업체다.

1·2차 세계대전과 비행기 제조업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을 실현시켜준 비행기는 1903년 미국 라이트형제의 첫 비행 이래 미국과 유럽의 다양한 시도 속에 발전해갔다. 초기 비행기는 날개와 동체 프레임을 나무로 만들고 휘발유 엔진과 코팅된 천을 사용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더 먼 비행거리를 겨루며 독립적으로 발전하던 비행기 산업은 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쟁 기간 동안 전세계 비행기 생산은 총 21만대에 달했다. 세계대전 초기 비행기 생산을 주도했던 것은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미국의 비행기 생산대수는 폭발적으로 증가, 전쟁 마지막해인 1918년에는 미국의 비행기 생산량이 2만1000대에 달했다.

전쟁이 종료되고 난 후, 전투용으로 제작되던 비행기는 우편서비스 등으로 사용처를 다변화했지만 과잉생산은 불가피했다. 다만 1927년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 등으로 비행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고, 복엽기에서 단엽기로, 알루미늄합금인 두랄루민을 채택하는 메탈 바디로 진화하면서 생존에 성공한 기업들은 성장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도 항공기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직후인 1942년 2만2000대 생산되었던 전투용비행기는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까지 30만대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2차대전 역시 전후 과잉생산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냉전체제가 본격화될 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산업 구조조정과 합병 움직임

보잉의 설립자 윌리엄 보잉은 취미로 시작했던 비행기에 매료되어 1916년 첫 수상비행기 제조회사인 'Pacific Aero Products Company'를 설립하고 이듬해 'Boeing Airplane Company'로 개명한다.

첫 고객은 뉴질랜드 정부였고 수상기를 이용한 우편배달서비스를 위해 판매되었다. 우편서비스에 특화되었던 보잉은 미국 시애틀에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를 연결하는 우편항로를 개설한 '허바드항공수송'에 비행기를 판매했고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 항로도 개척한다.

이후 보잉과 허바드는 'Boeing Air Transport Company(보잉항공운송사)'를 설립한다. 이후 Pacific Air Transport, Varney Airlines등 여러 우편항공운송사를 인수하면서 영역을 넓혀갔고, 이에 필요한 비행기, Model 40을 신규로 개발, 취항시킨다.

이러한 비행기 제조와 항공 운송을 함께 운영하는 전략은 1928년 Boeing Aircarft and Transportation Company라는 지주사로 발전했고 1929년에는 더 큰 지주회사인 United Aircraft and Transportation Company(UATC)를 탄생시켰다.

이 UATC 그룹에는 항공사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과 스타우트 에어라인, 엔진 제작사인 프랫 앤 휘트니(Pratt & Whitney), 비행기 제조사인 보잉, 시코르스키(Sikorsky), 노드롭(Northrop), 스터먼(Stearman), 프로펠러 제작사인 Standard Steel Prop and Hamilton Aero Manufacturing이 포함되었다.

항공운송 서비스와 제조업의 통합으로 몸집을 키워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이후 다우존스 지수에 편입되었던 UATC는 반독점법 위반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미국 의회는 1934년 회사 분할을 명령한다.

이후 UATC그룹은 항공운송분야는 시카고에 기반을 둔 United Air Lines로 분할이 되었고 제조 분야는 미시시피강 동쪽의 경우 United Aircraft Corporation(추후 United Technology로 개명)으로 분할되어 프랫 앤 휘트니, 시코르스키 등을 거느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미시시피강 서쪽의 제조 부분은 시애틀에 본거지를 둔 Boeing Airplane Company로 분할된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군용기와 민항기 양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한 보잉은 다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1996년 Rockwell International의 방산·우주 분야를 인수한 데 이어 1997년 군용기 분야 1위, 민간항공 분야 3위였던 맥도넬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와 합병을 통해 전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우주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늘의 요새'(Flying Fortress)로 불리며 미군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했던 'B-17'. 사진=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늘의 요새'(Flying Fortress)로 불리며 미군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했던 'B-17'. 사진=연합뉴스

군용기 생산으로 대형 항공업체로 도약

보잉은 2차대전 중 미국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한 B-17을 1935년에 개발해 공급한다. 초기 모델299에서 시작해 YB-17, YB-17A, B-17B에서 B-17E까지 단독 납품한 이후 B-18F부터는 더글라스, 베가 에어크래프트사와 공동으로 생산, 공급하게 된다.

B-17G까지 총 1만2731대가 생산된 B-17은 보잉이 6981대, 더글라스가 3000대, 베가 에어크래프트가 2750대를 생산해 전시 생산체제의 전형을 보여주게 된다. 전세계 어디도 따를 수 없는 미군의 어마어마한 물량의 군용기 수요는 보잉을 대형 항공기 업체로 도약 시켰고 이후에도 군수 분야는 보잉의 핵심 사업이 됐다.

B-17 이후 1942년 B-29를 개발·생산한 보잉은 세계대전 이후 B-47(1947년), B-52(1952년) 등 군용기를 잇달아 선보였다. 나중에 보잉에 인수된 Rockwell International은 2차대전 중 P-15 Mustang 전투기, F-86세이버 제트전투기(1949년), 가변익 폭격기인 B-1B랜서(1984년) 등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보잉에 합병된 맥도넬 더글러스 역시 군용기를 매우 활발하게 생산한다. 1946년 FH-1팬텀을 최초 항공모함 탑재형 제트기로 개발한데 이어 1958년 F-4팬텀, F-15이글(1972년), F/A-18 호넷(1978년)을 개발, 생산한다. 1997년 첫 비행에 성공한 F-22는 보잉과 록히드 마틴의 공동개발 결과물이다.

보잉의 여객기 사업 진출

초기 우편수송에 집중했던 보잉은 2차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여객기 시장에 진출한다. 여객기 시장에서 라이벌 더글라스와 록히드에 뒤처졌던 보잉은 북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제트여객기를 개발하기로 하고 1958년 4개의 엔진이 장착된 707기가 첫 비행에 성공한다. 1960년에는 3개의 엔진이 장착된 보잉 727이 첫 비행에 성공하고, 1963년에는 보잉 737이 첫 비행에 성공한다.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한 보잉 737은 1968년 본격적인 상업운행에 투입되었고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여객기 모델이 되었고 현재까지 생산되는 최장수 모델이다. 1969년에 첫 비행에 성공한 보잉 747은 대형여객기로 4개의 제트엔진, 최대 500명 이상을 탑승시킬 수 있는 기체이다.

이후에도 보잉은 757, 767, 777, 787 드림라이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제품을 투입하며 여객기 시장의 선두 위치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다.

보잉이 장거리 여객기 시장의 간판으로 개발 중인 777X 여객기. 사진=연합뉴스
보잉이 장거리 여객기 시장의 간판으로 개발 중인 777X 여객기. 사진=연합뉴스

여객기 분야에서 보잉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는 DC-3로 여객기 시장을 선점한 이래 DC-10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여객기 시리즈를 취항시킨 바 있다. 하지만 초기 앞서가던 여객기 시장에서 잦은 사고 등으로 신뢰를 잃어갔고 맥도넬과 합병 이후 MD-11등을 출시했지만 보잉을 앞서지는 못한 채 1997년 합병에 이르게 된다.

1972년 A300의 첫 비행으로 보잉의 경쟁사로 등장한 에어버스는 미국 방산업체에 맞서기 위한 유럽의 합작 법인이다. 프랑스, 독일 주도로 유럽 각국의 협력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는 에어버스는 초대형항공기 A380의 출시까지, 보잉과 대결할 수 있는 구도를 갖추고 있다. 미국내 민간항공기 생산이 보잉으로 실질적으로 단일화된 이후 시장을 양분하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군수와 민간, 모두에서 경쟁력을 갖춘 보잉

항공기 시장은 많은 업체가 경쟁하기 힘든 시장이다. 대당 가격이 높아 많은 판매대수를 여러 업체가 나눠 점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수시장이 크지 않은 국가에서는 경쟁력 있는 업체가 탄생하기도 힘들다. 막대한 민간 여객기 시장과 다른 모든 국가를 압도하는 군용기 시장을 가진 미국에서 업체들이 시장을 선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1934년 UATC의 분할 이후 보잉의 주요 경쟁업체들이 하나 둘 흡수합병되어간 것은 업황의 부침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군용기의 수요가 급감하는 전후, 냉전 종식 등의 시점에서 많은 업체들이 흡수 합병되는 과정을 거쳤다.

현재 여객기 시장에서 유럽의 에어버스와 경합하고 군용기 시장에서 록히드마틴과 경쟁하는 보잉은 두 시장 모두의 탁월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민간 항공시장의 회복과 저탄소-친환경 압박을 받고있는 변화된 환경에서 보잉의 입지가 주목된다.

 

●이영원 이사는 연세대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대우증권에서 리서치 업무를 시작해 푸르덴셜투자증권, 현대차투자증권에서 투자전략을 담당했다. 미래에셋증권에 합류한 이후 해외주식 분석업무를 시작, 현재 글로벌 주식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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