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광주 무등산에서 '허백련의 차정신'을 만나다
상태바
[김세리의 차(茶)인문다방] 광주 무등산에서 '허백련의 차정신'을 만나다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 승인 2021.05.11 14:53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의·다산·추사 →허련→허백련으로 이어진 조선 차 정신
허련의 방손 '의재 허백련', 무등산 중턱에 삼애다원·춘설원 세워
삼애는 애천· 애토· 애가로 홍익인간· 애국애족사상 고취시켜
허백련의 장손 허달재, 담박하고 검소한 '차의 정신' 유지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장] 우리 조선 시대의 차문화사에서 트로이카(troika)를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초의·다산·추사를 떠올린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들의 끈끈한 인연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행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다산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초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셋의 교유가 시작되는 첫 단초인 초의와 추사의 40년 깊은 우정도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최고의 차문헌인 초의의 『동다송(東茶頌)』도 저술되지 않았을 확률도 매우 높다. 

조선 차 문화를 이끈 초의 · 다산 · 추사  

다산 정약용의 유배는 다산 본인에게 있어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었겠지만, 조선 우리 차문화의 변화와 성장에 있어서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해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초의는 추사 김정희와의 인연에 대해 “서로를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못하는 사이(不忘相思相愛之道)”라 했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존중하며, 차(茶)를 중심에 두고 평생 서로간의 존경과 아끼는 마음을 나누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제자가 있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3)이다. 시·서·화에 능한 19세기 대표적인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우는 소치에게는 추사와 초의라는 두분의 대스승이 존재했다. 소치의 기량을 알아본 초의는 추사에게 그를 소개했다. 

추사는 소치를 높이 평가하여, 원나라말 사대가 중 한 사람인 대치(大痴) 황공망(黃公望)만큼 뛰어난 화가가 되라는 뜻으로 ‘작은 대치’ 즉 ‘작은 황공망’이라는 뜻의 '소치'라는 호(號)를 지어 주고,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크게 칭찬했다. 

소치 허련의 계산
소치 허련의 계산청취도

소치 허련은 「산수도첩(山水圖帖)」·「계산청취도(溪山淸趣圖)」·「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녹음간사(綠陰看舍)」·「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그리고 존경하는 스승 「김정희초상(金正喜肖像)」 등을 남겼는데, 누가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작들이다.

소치 또한 추사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자 해남까지 스승을 배웅했고, 이듬해에는 제주도로 직접 찾아간다. 지금이야 제주 가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당시 바다 건너 섬으로 가는 길은 목숨을 건 험난한 길이었다. 

이후로 두 차례 더 제주도를 방문하며 '그림 스승' 추사와 '차 스승' 초의의 편지와 안부를 전하는 우정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열고 작품 활동에 몰두한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 허형, 손자인 남농 허건, 그리고 방계인 의재(毅齊) 허백련에게 계승된다. 이후 추사와 초의의 화맥(畵脈)과 다맥(茶脈)은 의재 허백련에 의해 이어지게 된다.

광주 무등산 자락의 차밭과 등심사. 사진=김세리 원장
광주 무등산 자락의 차밭과 등심사. 사진=김세리 원장

'춘설헌'과 의재 허백련의 차생활

광주 무등산은 일반인들에게 '수박계의 명품' 무등산 수박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있는 장소가 숨겨져 있다. 바로 삼애다원과 춘설헌(春雪軒)이다. 의재 허백련이 꿈꾸는 민족정신의 결정체인 곳, 홍익인간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던 그런 곳이다.
 
의재 허백련은 한국 남종화를 완성한 소치 허련(許鍊)의 방손(傍孫)으로, 역시 한국 근·현대 회화사에서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南宗畫風)을 계승한 남종화의 대가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다 해방과 함께 내버려 두고 있던 무등산 다원을 인수해 전통 녹차의 재배·제다에 애써 '삼애다원'을 탄생시켰다.  

삼애(三愛)는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가(愛家)를 일컫는 것으로 하늘(하나님, 창조주), 땅(조국, 국토), 가정(부부, 형제, 자녀)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천지인 삼위일체 사상도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홍익인간사상과 애국애족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정신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의재 허백련이 일군 삼애다원의 풍경. 사진= 김세리 원장
의재 허백련이 일군 삼애다원의 풍경. 사진=직헌 허달재 선생

춘설헌(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은 의재(毅齊)가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그가 타계한 1977년까지 기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으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Gheorghiu, C. V.) 등 국내외의 명사들과 교유하기도 했던 곳이다. 
 
의재 허백련은 차를 마실 때의 마음은 선(禪)을 할 때와 같다고 했다. 차는 고요하고 엄숙한 마음, 골똘히 수도(修道)하는 마음, 선(禪)을 하는 자세로 음미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춘설헌에서 화필(畵筆)을 들기 전에 춘설차(春雪茶)를 뜨겁게 끓여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이 사유하며 마셨다. 춘설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지 낀 마음을 씻어 내린 다음 붓을 들었다.

“춘설차로 속기(俗氣)를 씻어내야 붓 끝이 깨끗해지거든.” 뜨거운 춘설차를 마시면 마음은 더 없이 깨끗해진다고 했다.

의재 허벽련 선생의 생전 모습.
의재 허벽련 선생의 생전 모습.

그는 춘설차를 통해 평생 맑은 기품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1977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몇 달 전에 춘설헌 병상에 누워 남긴 말 속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있다. 

"요 몇 해 동안은 줄곧 건강이 나빠져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나를 따르던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무등산 그늘로 병든 나를 찾아와준다. 그들은 춘설헌 남향 방에 누운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잔을 권한다. 나는 차를 마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춘설헌. 의재 허백련 선생은 평소 이곳에서 차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사진=김세리 원장
춘설헌. 의재 허백련 선생은 평소 이곳에서 차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사진=김세리 원장

정신을 맑게 하는 차, 나라를 맑게 하는 차

호젓한 분위기의 춘설헌은 의재의 묘가 자리잡고 나서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차마시기 운동으로 국민들의 정서를 맑고 건강하게 지키고 싶었던 의재 허백련. 그의 마음이 지금까지 고즈넉하게 남아있다. 의재의 민족정신과 화맥, 다맥은 현재 장손인 직헌 허달재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역사의 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갑고 또 감동적이다. 

직헌 허달재 선생의 매화그림.
직헌 허달재 선생의 매화그림.

마침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가지 끝 흰 것 하나’라는 주제로 직헌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2021년 6월13일까지다. 매화 대작을 비롯하여 남종화의 품위가 가득한 직헌의 작품에는 의재와 소치의 그것이 함께 담겨있다. 

그의 차생활은 선대에서 그러했듯 담박하고 검소하다. 차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설록차는 ‘춘설녹차’에서 춘을 떼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만큼 춘설차가 지니고 있는 위상은 특별하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현대 차인들은 ‘춘설헌’과 ‘춘설차’가 가지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이유가 어찌 되었던 차는 그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마시는 음료는 아닐 것이다. 향기로운 차 한잔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하고, 나의 정신을 맑게 하는 역할을 한다. 차 마시는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사유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함께 담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시대에 의재 허백련의 차의 정신은 재조명되고 회자되어야 한다.

삼애다원에서 김세리 원장.
삼애다원에서 김세리 원장.
● 김세리 차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은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와 한국 현대 다법 및 차문화 콘텐츠를 다각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차분야별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차문화연대기 <차의 시간을 걷다>을 저술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문상용 2021-05-14 07:42:29
수종사도 김세리님 글을 읽고 갔었습니다. 지인글과 가서 차도 한잔하고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무등산에도 가고 싶네요 좋을 글 감사합니다

macmaca 2021-05-11 17:22:29
매년 설날이나 추석에는 조상님께 아침 일찍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지낸다. 본래 차례(茶禮)는 뜻 그대로 차를 신이나 조상님께 올리는 의식이었다...차 문화가 중흥하기 시작한것은 기온이 다시 높아지고,정약용(丁若鏞, 1762〜1836),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같은 인물들이등장하면서부터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차를 즐기기 시작하여 차와 관련한 많은 시를 남겼다.출처: 한국의 차(茶)- 역사를 바꾼 기호음료 (한국의 생활사, 김용만)

macmaca 2021-05-11 17:12:32
엄밀히 말해 차는 차나무잎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차나무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로 동백나무과이고,식물학적 기원은 6000만∼700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차나무는 중국 미얀마 인도 등 동남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원산지다. 출처: 차(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macmaca 2021-05-11 17:11:52
신농(神農) 황제는 위생상의 이유로 항상 물을 끓여 먹었는데, 하루는 끓고 있는 물 위에 몇 가지 종류의 나뭇잎이 떨어졌다. 신농 황제는 식물의 잎을 우려내면 물맛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사람들이 이 물맛에 매료되었고 그로부터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 차의 기원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이다.어쨌든 중국은 차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차를 마신 나라임은 분명해 보인다. 출처: 차[Tea] (1%를 위한 상식백과, 2014. 11. 15., 베탄 패트릭, 존 톰슨, 이루리)

엄밀히 말해 차는 차나무잎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차나무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로 동백나무과이고,식물학적 기원은 6000만∼7000만년 전으로

호동 2021-05-11 16:57:32
그리 깊은 그림과 차의 인연이 흘러흘러 무등산 기슭 춘설헌까지 당도한 것이군요

춘설차, 향이 어떤지 마시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