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②] 태풍의 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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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②] 태풍의 진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3 17: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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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달러를 흥청망청 쓰다가 엔화 절하로 수출급락

1990년대 들어 태국은 철철 흘러 넘치도록 외국돈을 빌려 썼다. 탐욕스런 선진국 은행들은 마음껏 돈을 빌려줬다. 몇 년째 연간 성장률이 8%를 기록하며 신화를 창출하는 나라에, 게다가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수익처에 돈을 붓지 않는 선진국 뱅커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태국 금융기관의 대출 관행이나 기업의 거래관행이 서구식 합리성과 투명성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외국 뱅커들은 태국 은행과 기업에 마구잡이 식으로 달러를 퍼붓다시피 했다. 1997년초까지 외국 은행들은 70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태국에 빌려주었다. 97년 초만 해도 태국 경제는 희망적이었다. 한해전과 같이 성장 일변도의 경제를 구가할 것 같았다. 96년 성장률이 6.7%로 95년의 8%보다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태국인들은 수년간의 고도성장에 대한 일종의 조정 과정으로 여겼다.

태국인들은 달러를 흥청망청 써댔다. 국내 사채시장 금리는 18%의 고금리였는데 비해 달러 이자는 7~8%에 불과했고, 엔화 이자는 그보다 쌌다. 금융기관들은 외국돈을 빌려와 국내 기업에 빌려주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손 짚고 헤엄치기식」 장사를 했다.

태국 은행들은 외국에서 저리의 돈을 끌어들여 기업들에게 돈을 물씬 빌려주었다. 태국 기업들은 고층빌딩을 짖고, 호화아파트를 짓는데 달러를 흥청망청 써댔다. 그들은 얼마후 건물 비용이 건축비보다 떨어지고 바트화가 폭락, 달러가 그렇게 비싼 돈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1996년말부터 선진국 은행들 사이에서 태국이 과연 해외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을지 걱정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삭빠른 일부 외국 뱅커는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해를 넘겨 97년 2월 외국 자본이 부분적으로 철수함에 따라 달러 부족에 따른 바트화 하락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국제금융시장에 돌았다. 그들은 곧 바트화가 폭락할 것을 기대, 바트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였다. 그러나 바트화 폭락을 기대하고 본격적으로 덤벼든 것은 그해 5월 미국의 헤지펀드들이었다.

헤지펀드들이 공격을 감행하는데도 방콕 당국은 낙관적인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자 주가는 폭락하고 외환 투기꾼들은 바트화 하락을 호시탐탐 노리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사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태국의 부채가 정부가 인정하는 액수보다 많을 것으로 믿었다.

태국 기업의 악성 채무 또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기업들은 부채 상환을 하지 못해 부채 만기를 연장하거나 또다른 부채로 전환하는 리스케쥴링(부채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앙은행인 타일랜드 은행이 5월말 경제성장 전망치를 당초 6.7%에서 5.9%로 하향 조정했다. 시속 100 킬로미터로 달리던 자동차가 순간적으로 60 킬로미터로 속도를 줄이는 과정의 저항감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87년부터 95년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8%대의 성장률을 자랑하던 태국 경제가 수직 하강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됐다. 비관적 견해를 가진 경제학자들은 성장률이 3%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태국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을 회생시키기 위해 구제금융을 잇달아 퍼부었다. 그 금액이 100억 달러에 이르렀고,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했다.

태국 법정에는 부채 상환을 요구하는 소송이 줄을 이었다. 기업들은 연쇄부도에 시달렸다. 한 기업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다른 기업도 같은 처지가 되고, 부도는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경제에 관한 한 좋은 소식이라곤 들을 수 없었다.

내리막길로 들어선 태국 경제엔 백약이 무효였다. 주력산업인 섬유와 신발 산업에서 10,000 여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경제 공황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싹텄다. 기업들이 이자도 갚지 못하는 바람에 이자 미상환비율이 4월말 현재 전년 동기 대비 27%나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태국 금융기관들이 앞으로 1년반내에 6,000억~8,000억 바트(233억~311억 달러)의 부실 채권이 쌓일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부동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5월에는 태국 최대 전기 재벌인 알파텍 그룹(Alphatec)이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와 합작키로 한 사업 2건이 무산됐다. 알파텍이 약속한 자금을 대지 못하자 미국의 파트너가 손을 뗐기 때문이다. 알파텍의 자회사인 서브마이크론 테크놀로지(Submicron Technology)도 자금이 달려 설비 공급자에 대한 대금은 물론 직원 봉급도 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기업인 알파텍은 만기가 돌아온 은행 부채 340만 달러를 연기했다고 발표했다.

군소 투자자들도 빚에 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가가 96년 최고치에서 60%나 빠졌고, 주식투자에서 물린 돈만 해도 태국 전체로 40억 달러나 됐다. 태국 기업의 부채는 얼마나 되는지 정부도 몰랐다. 부실 채권은 곳곳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금융시장 전체가 과도한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 1997년에 불어닥친 태국 통화위기로 방콕 도심에 기업부도로 대형빌딩의 건설이 중단됐다. /싱가포르 타임스 캡쳐

 

그러면 태국의 비극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간접적 이유는 일본 엔화 절하였다. 엔화는 1995년 5월 1달러당 80엔까지 강세를 유지했다가 그후 1년반만에 120엔대로 50%나 치솟았다. 태국은 달러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달러에 바트화를 묶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엔화 하락의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태국을 비롯, 동남아시아 지역은 엔화 경제권으로 분류된다. 값싼 엔화를 무기로 일본 제품은 동남아로 밀려들었고, 일본으로 가는 태국 제품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수입이 늘고, 수출은 줄어들었다. 그 효과는 무역적자 확대로 나타났다. 그 결과 태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정 불안도 큰 요인이다. 정정불안 자체가 외국인투자자들의 철수 요인은 아니지만, 정부 당국자가 과감한 개혁을 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1996년 12월 입각한 암누아이 와라완(Amnuay Varavan) 재무장관은 개혁성향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 축소, 은행 대출 규제 강화, 부실 은행의 인수 및 합병, 2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 등을 과감히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가 거꾸러지면서 그는 연립정권 내부에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야당은 사사건건 재무장관을 물고 늘어졌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부가가치세의 일종인 소비세 도입이었다. 소비세는 야당이 의회를 마비시키면서까지 강력히 반대했고,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제기됐다. 경제가 휘청거리자, 제조업자들은 소비세 부과를 연기할 것을 여당에 로비했고, 재계와의 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여권도 무작정 소비세를 밀어부칠수 없었다. 마침내 소비세 부과 법안은 내각에서마저 부결됐고, 그는 물러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6월 19일 새로 재무장관에 오른 사람은 타농 비다야(Thanong Bidaya)라는 49세의 젊은 경제학자였다.

타농 장관이 중병에 신음하는 태국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부실 은행을 파산시켜, 썩은 살을 도려내는 극약 처방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태국은 정치적 전환기였고, 불안한 정정이 지속되고 있었다. 정정이 불안한 나라의 집권 여당에게 수백만 명의 고객이 매달려 있는 은행을 파산시키고, 해외 자본이 요구하는 시장 개방을 단행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제 자본의 논리보다는 국내 자본에 영합하는 것이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켜준다.

과도기에는 정치인들이 국제 금융시장의 논리를 수용하는 본질적 해결보다는 진통주사로 아픔을 잠시 잊으려고 한다. 타농 장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실무경험과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과감한 개혁을 드라이브할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기업의 부채 만기를 연장해주고, 금융기관의 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허용하는 것등이었다. 파국을 며칠 연장하는 조치에 불과했고, 병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중병에 시달리는 태국 경제에 가장 결정적인 치명타는 헤지펀드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외환보유액에서 엄청난 자금을 꺼내 썼다는 점이다. 정부의 보유 외환은 태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은 태국을 썰물처럼 빠져나갈 태세를 보였고, 이를 막을 외환보유액은 거의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6월 27일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자금난에 시달리는 16개 금융기관에 대해 영업정지를 명령하고, 이들 금융기관에 합병 및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미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재무장관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차왈릿 용차이윳(Chavalit Yongchaiyuth) 총리는 󰡔앞으로 경제는 내가 책임을 지고 챙기겠다󰡕며 직접 나섰다. 그는 97년도 상반기를 마감하는 6월 30일 󰡔바트화 절하는 절대로 없다󰡕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침몰직전의 자국화폐를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차왈릿 총리의 남은 선택은 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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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휘 2020-01-20 13:32:44
경제에 관심도없던 제가 이해하기 쉽게 큰줄기만 따라가주셔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