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묵묵함으로 걸어온 배우 윤여정의 '별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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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묵묵함으로 걸어온 배우 윤여정의 '별의 순간'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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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요즘 정치권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이 바로 ‘별의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열려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최고의 타이밍이란다.

드디어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 오스카상 수상’이라는 별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아시아 최초의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실로 경이로운 성과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에서 그것은 도전과 가능성을 담보하는 주요 잣대 중 하나다. 그렇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의 불가항력을 위로하기 위한 관용어구 쯤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그녀가 보기 좋게 불식시켰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75세 배우가 만들어낸 ‘최초’라는 타이틀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이 들어감을, 늙어감을 원치 않는 세상 속에서 윤여정의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는 숫자에 얽매여 가능성을 봉인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되기에 충분하다.

묵묵함이 빚어낸 최고의 순간

그저 변함없이 연기했을 뿐이다. 애초에 작은 독립영화 ‘미나리’로 기대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품의 순수함에 이끌려, ‘순자’라는 캐릭터에 자유를 부여해준 정이삭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했던 영화 한 편이 그녀의 연기 인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게 했다. 할머니답지 않은 헐머니를 창조해내며 ‘미나리’ 최고의 신스틸러가 된 것이다. 

‘연기가 하고 싶어서’라는 상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그녀는 아들들과 먹고 살기 위해 연기를 해야만 하는 생계형배우였다. 20대에 맛본 스타의 삶을 내려놓고 자존심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배역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형이다. 하지만 구차해 보일 것 같아 그런 솔직함을 드러내긴 쉽지 않다. 연예인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생활에 대한 절실함이 배우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동력이었기에 그녀는 쿨하게 말한다. 대본이 성경이었다고.

그렇게 묵묵히 걸어왔다. 때로는 회장님 사모님으로, 때로는 박카스 아줌마로 변신하며 유니크한 캐릭터를 구축해갔다. 

특히 故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 집주인을 유혹하며 파멸로 이끄는 주인공 명자로 일약 스타가 됐던 그녀는 2010년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김기영 감독의 1960년 영화 ‘하녀’를 오마주한 작품)에서는 집주인과 관계를 맺는 젊은 하녀 은이(전도연)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찰자, 늙은 하녀 병식으로 출연하게 된다. 옛 영광을 떠올렸다면 불가능한 선택이었을 텐데 오랜 세월의 간극을 인정한 윤여정이기에 가능한 필모그래피를 만들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운이 좋아 이 상을 받게 됐다”고 겸손하게 소감을 전했지만 그 ‘운’은 스타로 출발해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생계형 배우로 쉼 없이 살아왔던 연기 인생 55년이란 긴 시간이 응축돼 만들어진 결과다.

국민배우나 국민엄마라는 호칭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그런 꾸준함이 마침내 영화 ‘미나리’를 만나 발화한 것이다. 우연히 찾아온 ‘운’이 아니란 걸 대중은 누구보다 잘 안다.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프레스룸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있다.사진=EPA/연합뉴스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프레스룸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있다.사진=EPA/연합뉴스

기억되기보다 계속 걸어가기

그녀는 오스카상 수상이 최고의 순간임을 부정한다. 최고, 경쟁, 1등은 싫고 ‘최중(最中)’만 하고 살겠단다. 또 한 번의 어록 탄생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최중’이라는 신조어는 뻔하지 않은 윤여정식 인생철학이 아닐 수 없다. 기억되기보다 계속 걸어가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앞으로 계획은 없고 살던 대로 살겠다는 쿨내 진동하는 발언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가 영원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어른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대중이 원할테니 계획은 넘쳐날 것이며 당분간은 살던 대로 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터. 

2021년, 배우 윤여정은 ‘1인치(자막) 장벽’ 뿐 아니라 ‘나이의 장벽’까지 뛰어넘으며 인생 최고의 멋진 레테르를 선물 받았다. 당당함으로 무장한 70대 여배우의 한계 없는 비상(飛上)은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인터뷰 내용을 곱씹으며 매일같이 뻔한 삶에, 나이 들어서라는 뻔한 이유로 어느 순간 닫아버린 내 인생의 도전과제를 슬며시 꺼내본다. 충격만 받아서야 되겠는가.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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