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국①…해상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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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국①…해상왕국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0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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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나타난 철(鐵)의 교역로 전쟁

강원도 삼척 일대는 신라에 의해 실직주로 개편되기 앞서 실직국이라는 독립국이 있었고, 토착 세력이 주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신라와 고구려, 말갈, 예국과 치열한 영토 싸움이 벌어진 분쟁 지역이었다.

실직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에 의해 사라진 숱한 소왕국들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나라다. 자세한 자료가 없지만, 삼국사기와 최근 고고학자들에 의해 출토된 유물을 통해 고대국가 실직국의 얼개를 그려 볼 수 있다. 실직국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에 주로 등장한다.

 

파사이사금 23년(102년) 가을 8월,

① 음집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 문제로 다투다가(爭疆) 임금에게 찾아와서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② 임금이 어려워 하다가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귀속하게 했다.

③ 이에 임금은 6부에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명했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연회의 주인을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연회의 주인으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耽下里)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종은 도망하여 음집벌국 우두머리인 타추간(陁鄒干)의 집에 의탁했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④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⑥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했다. 실직(悉直) 압독(押督) 두 나라 임금도 와서 항복했다.

 

이 기사는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지만, 전개 과정은 몇 단계로 나뉜다. ▲실직곡국과 음집벌국 간의 강역 다툼(爭疆) ▲금관국의 개입 ▲수로왕의 도발 ▲신라의 공격 ▲음집벌국, 실직, 압독 항복.

실직국과 실직곡국의 차이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실직곡국이 실직국의 직할 영토라는 주장과 식민지라는 주장이 있다. 논쟁의 결론은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에게 맡기기로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직할 영토이든, 식민지든, 실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임은 분명하다. 네 나라가 엉켜 전쟁을 벌일 만큼, 실직곡국은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파사이사금조에 등장하는 실직국은 강원도 삼척을 중심지로 하는 국가이며, 음집벌국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압독국(압량국이라고도 했다)은 경북 경산시 압량면으로 비정(比定)된다. 금관국은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를 말한다.

이 기사는 의문투성이다. 삼척과 경주시 안강, 그 먼 거리에 떨어진 소국이 과연 싸웠을까. 싸웠다면 연유는 무엇일까. 금관국은 왜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개입했을까. 전쟁 당사자도 아닌 압독국이 남의 전쟁에 구경만 하면 될 것이지, 왜 신라에 항복했을까.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신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됐고, 패전국의 내용은 거의 삭제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의문이 증폭된 감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의문을 풀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난다. 중국 사람이 쓴 삼국지(三國志)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는 원나라 말기에 나관중(羅貫中)이 쓴 중국 정통 소설을 말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삼국지는 중국 서진(西晋, 265~316) 무제 시대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역사서를 말한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로 나뉘어 있고, 그중 위서 30권 가운데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흔히 ‘동이전’이라고 부른다) 변진조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나라(변한)에서 철이 나는데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시장에서 매매할 때 철을 사용함이 중국의 동전 사용과 같아, 넉넉히 사용했다.”

—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에서 지칭한 변한은 나중에 가야 연맹체로 됐고, 연맹의 맹주는 금관국이다. 예로부터 금관국에는 철이 났고, 금관가야는 이 철을 진한의 맹주인 신라(사로), 왜국, 예국(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부족국가)에 팔았다. 근래의 고대유물 발굴을 통해 삼척을 중심으로 하는 실직국은 강릉 중심의 예(동예)와 동일한 종족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인류사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물질이 철(鐵)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류는 쇳덩어리를 녹여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벌이고, 농구를 만들어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고대에는 철이 아주 귀했고, 이미 󰡔삼국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한반도 부족국가들은 이 쇠를 화폐로 사용했다. 금관가야는 철을 매개로 한반도는 물론 일본까지 무역을 했고, 육로보다는 해로를 이용했다. 금관국은 철의 최대 수출국이자, 해상교역로를 확보한 해상국가였다.

 

▲ /그래픽=김인영

그렇다면 삼국사기 파사이사금조의 실직-음집벌국 간의 영토 싸움의 윤곽이 그려진다. 바로 금관국의 철을 운송하는 해상수송로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벌인 전쟁과 다름없는 셈이다. 여기서 파사이사금조의 기사를 해석하기 위해 몇 가지 전제를 설정해 보자.

 

① 실직곡국은 영일만의 포항 일대의 항구도시다. 실직국은 동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세력이었고, 금관국의 철을 사오는 루트를 개발하기 위해 포항 근처에 항구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것이 실직곡국이다. 그리스의 아테네가 흑해와 소아시아 해안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

② 안강은 경주 시내에서 형산강을 따라 내려가다 형성된 마을로, 형산강과 동해가 만나는 끝에 아마도 실직곡국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실직과 음집벌국은 포항 항구를 놓고 필연적으로 영토 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신라와 금관국이 개입,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실직국-음집벌국의 기사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경주 안강읍에 위치한 소국 음집벌국은 내륙국이었고, 금관국의 철을 수입하기 위해 가까운 포항 지역의 항구가 필요했다. 그런데 포항에는 실직국이 실직곡국이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해 동해안 일대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실직곡국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진한 맹주국인 신라의 파사왕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런데 철 수출국이자, 동남해안의 해상권을 쥐고 있는 금관국이 개입했다. 변한 맹주국인 금관국의 수로왕은 동해안의 해상 세력인 실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음집벌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경주에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합의를 경축하는 연회가 열렸다. 수로왕과 파사왕, 음집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 실직국왕도 참석했다. 그런데 신라 6부 가운데 음집벌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기부가 불만을 표시했다. 한기부는 이웃한 음집벌국이 해상교역로를 확보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수로왕은 부하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갔다. 이에 파사왕은 진노했고,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포항의 항구도 빼앗았다. 포항의 해상 거점을 잃은 실직국은 신라에 속국임을 선언하면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그 대가로 해상 이용권을 얻어낸다. 또 다른 내륙국인 압독국도 포항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신라에 속국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실직국은 포항의 실직곡국을 차지하기 위해 2년 후인 파사이사금 25년(104년)에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신라는 병사를 보내 실직을 토벌하고 평정했다. 그리고 삼척, 울진 등지에 살고 있던 실직 국민을 남쪽 변경으로 옮기도록 사민(徙民)정책을 취한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실직국이 2세기 초인 파사이사금 25년에 멸망한다. 실직국 백성들은 고향 땅을 등지고, 아마도 신라와 금관국과의 경계지역인 부산 또는 경상남도 일대로 보내져 가야와의 전투에 동원됐을 것이다. 고대에 나라 잃은 백성들은 노예나 다름없다. 실직국인들은 슬플 겨를도 없이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남부여대(男負女戴). 삼척에서 부산까지, 그들은 마치 6․25전쟁 때의 피난행렬처럼 아이와 가재도구만 이고 지고 쫓겨 갔다.

이에 비해 압독국은 처음엔 신라에 고분고분했다. 실직국이 멸망한 지 2년 후인 106년 정월에 파사왕은 압독에 행차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해 주는 등 유화정책을 취했다. 파사왕이 3월에 돌아왔으니, 두 달 동안 압독에 머물며 점령지의 반란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 백성들을 신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압독국 사람들은 40년 후인 일성이사금 13년(146년)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는 병사를 일으켜 평정하고, 실직국인들에게 취했던 것처럼 남은 백성들을 남쪽 지방으로 쫓아냈다. 정복국가 신라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 준다. 고분고분하면 도닥거려 주고, 저항하면 말살시키는 정책이다. 이처럼 고대나 현대나 전쟁은 가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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