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㉖ 20세기 초 한국의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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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㉖ 20세기 초 한국의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 (上)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4.03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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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황성신문에 사상 첫 영화광고 등장
미국인 콜브란, 한국에 첫 영화 들여와
첫 상영 폭발적 반응...수천명 몰려들어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오피니언뉴스=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새로운 밀레니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대중 문화는 영화 산업을 중심으로 급성장을 거듭해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 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끌어가는 이 세계적인 흐름은 동방의 조용한 나라 한국도 비껴가지는 않았다. 

20세기 초 한국의 새로운 세기는 500년 가까이 이어온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고 마지막 임금이었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3년째에 접어든 해에 맞이했다.

대한제국은 이름만 제국이었지 다른 제국 열강들의 이권 차지를 위한 아귀다툼이 극에 달해 정국은 늘 혼란하고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도 좋을 리는 없었다.

20세기 초반의 한국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은 이런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대중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축음기같은 일부 서구 문물들이 흘러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는 극 소수의 상류 계급의 전유물이었고 대중 문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일반 대중에게 새로운 신 문물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03년 처음 상영됐다. 20세기초 해외 촬영기사가 조선말 거리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03년 처음 상영됐다. 20세기초 해외 촬영기사가 조선말 거리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한국 최초의 영화 상영

한국에서 현대 대중 문화라고 부를만한 것이 시작된 건 1903년에 들어서였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가 상영된 지 8년여만에 이 땅에도 일반 대중들을 위한 상업 영화라는 것이 상영된 것이다. 1903년 6월 23일자 당시 '황성 신문'에 광고 하나가 실렸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 사진(영화)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명 (생생하다는 의미) 도시, 각종 극적인 극장 (극적인 장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 (活畵)이라 할 만하다. (중략) 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진실로 바라는 것은 백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중략) 화인(畵人-영화속 인물들)의 활동은 오히려 생동감이 있는데 생민(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능히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대한의 선비와 같아서 하는 말이다. (중략) 이렇기 때문에 화인의 활동을 원하지 않고 다만 오늘날 생민의 활동을 원한다 하는 것이다” 사진은 영화관련 황성신문 사설 일부 발췌. 출처=위키피디아.
황성신문 1903년 6월23일자 영화관련 광고. 사진=위키피디아

이 광고 글은 사료로 존재하는 한국 첫 영화 광고라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상영회가 활동 사진(영화)의 첫 공개는 아니다. 이전에도 외교관들이나 선교사들에 의한 상영회는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활동 사진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에 논설이 하나 실렸는데, 영화를 의미하는 ‘활동사진’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 (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이라는 이 논설은 북청사변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 사건을 지칭)의 기록 영화를 보고 쓴 글이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 (活畵)이라 할 만하다. (중략) 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진실로 바라는 것은 백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중략) 화인(畵人-영화속 인물들)의 활동은 오히려 생동감이 있는데 생민(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능히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대한의 선비와 같아서 하는 말이다. (중략) 이렇기 때문에 화인의 활동을 원하지 않고 다만 오늘날 생민의 활동을 원한다 하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여전히 구태에 빠져있는 선비 계급들을 두고 ‘살아있는 사람보다 영화 속의 사람들이 더 낫다’라고 에둘러 선비 계급들을 질타한 것이다. 아마도 작자는 활동 사진을 보고 시대가 이렇게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옛 조선의 구태에 젖어 변하려 하지 않는 선비 계급들이 한탄스러웠던 것 같다. 

첫 영화 상영에 보인 폭발적인 반응

한국 땅에 영화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당시 한성전기회사를 운영하던 콜브란이라는 미국인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원래 한국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 보스트윅이 합자하여 만든 회사로 1898년 서대문과 홍릉 (청량리)에 첫 노선 운행을 시작한 회사였다.

전차 개통 후 전차 사고가 빈번하게 나고 전차 시설 확장 과정에서 황실과 콜브란 측 사이에서 채무 분쟁 등이 일어나며 ‘전차 안 타기 운동’이 벌어지자 전차 이용객을 늘리고 나쁜 여론을 우호적으로 돌려볼 목적으로 동대문 내 전기 창고에서 활동 사진 상영을 시작했다.

일종의 기업 마케팅 활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 ‘진귀한 발명품’을 보기 위해 수 천명의 관객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빈 담뱃갑을 가져오면 무료입장권을 주겠다는 광고. 사진출처=한국 영상자료원.
빈 담뱃갑을 가져오면 무료입장권을 주겠다는 광고. 사진출처=한국 영상자료원.

너무 사람이 많아 다른 곳에도 영사기를 설치해 상영을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으나 한달도 안되어 화재가 발생해 상영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이 역대급 흥행에 감명을 받은 다른 회사들도 마케팅에 활동 사진을 도입하면서 한국 내에 활동 사진의 상영이 늘어나게 된다.

특히 영미연초회사는 골드 피쉬, 히로 등 자사의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빈 담배 갑을 가져오는 사람에겐 무료로 영화를 관람하게 하여 혹시나 버려진 담배 갑이 없나 거리를 구석 구석 찾아다니는 풍경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20세기 초반의 한국의 대중문화는 세계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게 착실히 따라가고 있었다. 2년 뒤인 1905년 을사 늑약이 체결되고 대한 제국의 기운은 점점 쇠락해가고 있었지만, 20세기 시작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대중 문화와 콘텐츠 산업은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100년 뒤의 전 세계를 휩쓸 ‘한류’로 성장한 그 씨앗이 말이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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