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⑥·끝] 7년 전쟁이 끝나고…조선 도자기, 유럽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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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⑥·끝] 7년 전쟁이 끝나고…조선 도자기, 유럽서 인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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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류큐 침공

임진왜란(1592~1598)은 우리나라에서 조선과 중국이 한편이 돼서 일본과 벌인 전쟁이다. 이 전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그로부터 300년후, 한반도에선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시 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1894~1895년)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 세력의 힘이 부딪치는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느 일방의 공격은 곧바로 국제전으로 비화되고, 전쟁이 끝난후 세력권마다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죽음으로 전란중에 힘을 보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권력을 장악했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해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됐고, 요동(遼東)에서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대할 틈을 주어, 왕조 교체의 계기를 제공했다.

류큐국 왕궁이었던 슈리성

또하나, 이 전란으로 국권을 손상당한 곳이 류큐(琉球)다. 류큐(오키나와)는 일본 가고시마에서 타이완 사이를 활처럼 연결하는 열도국이다.

류큐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가 출현했다. 족장들의 지위는 평등했다. 12세기경 부족들이 병합되면서 오키나와 섬에는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왕조가 들어서 이른바 삼국시대가 열렸다. 1372년 명태조 주원장은 류큐 3국에 조공을 바치도록 해 세 나라는 중국의 조공국이 된다.

1416년 중산국의 왕 파지(巴志)는 북쪽의 산북왕국을 병합하고, 이어 1429년 남쪽의 산남왕국을 정복해 삼국을 통일한다.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한다.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尙)씨라는 성을 하사한다. 조선 세종임금 때다.

이때까지 류큐왕국은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일본으로부터는 독립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각지의 영주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전국(戰國)시대였고, 류큐를 세력권에 둘 여력이 없었다. 명나라는 조공국으로 조선 다음으로 류큐를 배려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해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개무역을 하며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전인 1591년 8월 사쓰마번(가고시마)을 장악하고 있는 시마즈(島津)가문에게 조선 침략을 위해 1만5,000명의 군역 부담을 명했다.

이에 시마즈는 류큐왕국에게 병력 징집을 하지 않을 터이니, 7,500명이 10개월간 먹을 군량미 1만1,250석과 황금 8,000냥을 상납하라고 요구했다. 류큐왕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에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도요토미의 조선침략 계획을 보고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사쓰마번은 류큐 사신을 억류하고 군사 7,000명의 10개월치 식량을 조선에 상륙시킬 것을 강요했지만, 류큐는 재차 거부했다. 사쓰마번은 류큐열도 북쪽 5개 섬을 사쓰마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류큐는 이마저 거절했다. 류큐왕국은 간접적으로 조선과 명나라를 지원한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보복을 가했다.

7년 전란이 끝나고 도쿠가와의 새 막부가 열렸다 1609년 3월 사쓰마의 다이묘는 도쿠가와의 승인을 받아 3,000명의 병력과 선박 80척을 동원해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이유는 임진왜란때 협조를 거부했다는 것.

4월 5일 수도 슈리성이 점령되고, 류큐 국왕과 100명의 고관들이 사쓰마번으로 납치됐다. 복종을 거부한 충신은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다. 왕과 신하들은 도쿠가와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고 2년 6개월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사쓰마번은 그후 수도 슈리성에 감독관을 보내 내정을 간섭했다. 류큐는 북부 5개 섬을 사쓰마에 할양했다. 지금 류큐 열도의 북단 5개섬이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다. 이때부터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조공하는 이중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로부터 300년후인 19세기말, 일본이 다시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도할 때 류큐는 조선에 앞서 희생물이 되었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유신 주역들 사이에 정한론(征韓論)과 류큐 병탄론의 논쟁이 벌어졌다. 류큐를 먼저 병합하자는 쪽이 이겼다.

1879년 3월 27일 일본 정부는 500명의 병력을 류큐로 급파해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尚泰)를 폐위시키고 도쿄로 압송해 유폐시켰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450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30년후 1910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한일합병 조약에 따라 폐위된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하멜 기념비

임란중 왜군은 수많은 우리의 도공을 잡아갔다. 일본은 비싼 값을 주고 사들였던 중국 도자기를 조선 도공을 통해 공짜로 확보했다. 그들이 잡아간 조선인은 10만명에 이르렀다. 그중 다수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넘겨졌다는 사실이 서양선교사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조총과 중국 상품의 구입 대금으로 팔아넘겼던 것이다.

동양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서양에선 스페인의 무적함대 패배라는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출항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이던 영국 해선에 완패했다. 이로써 세계 해양의 주도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가고, 그 틈새에 네덜란드가 활약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네덜란드 상인이 동아시아에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중국의 도자기에 눈독을 들였다.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화물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캐슬리나호를 빼앗아 그 배에 실려있던 수십만점의 중국 도자기를 암스테르담에 가져가 경매에 붙였다. 그 경매에 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프랑스와 영국 국왕도 있었다. 물건이 모두 팔리고, 엄청난 이익이 발생했다. 이 이야기는 유럽의 귀족들을 흥분시켰고, 유럽에 도자기열풍이 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류는 유태인이었다. 그들은 이문이 나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갔다. 그들은 중국 도자기 집산지인 광저우에서 대량 주문을 넣어 배에 수만 점을 실고가 유럽에서 팔았다.

하지만 1643년 만주지방에서 흥기한 청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명의 잔당들이 해안으로 쫓겨나면서 해상봉쇄령이 내려졌다. 복건성 해상세력 정성공(鄭成功)이 1662년 대만을 점령해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자, 청은 바닷가 사람들을 내륙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렸다. 명나라의 해금령(海禁令연)보다 강화된 조치다.

이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할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도자기를 찾아 나섰는데, 대상은 조선과 일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발간된 「하멜표류기」는 조선의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선원이었던 헨드릭 하멜은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가 조선에서 탈출하면서 쓴 책이 유럽에서 큰 호기심을 일으켰다.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대규모 도자기 교역을 위해 1,000톤급 대형상선 「꼬레아호」를 준비하고 1669년 출항했다. 이 배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조선을 향해 출항을 대기하던 중에 일본 막부의 강한 반대에 부딛쳤다. 일본은 네덜란드가 조선과 통상하면 일본내 네덜란드 무역관을 폐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무명과 후추등을 수입해 이를 조선에 되팔아 수십, 수백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일본은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교역을 하면 조선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뺏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네덜란드는 한국에서 도자기를 도입하려돈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에 중국에서 수입하던 도자기를 일본에서 수입했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임진왜란때 납치한 조선인들에 의해 전수됐다.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 이삼평(李森平) 등이 규슈 사가현에서 만든 청화자기는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에 수출됐다. 유럽인들은 이 기술을 토대로 유럽 자기를 탄생시켰다. 유럽에서 제작된 자기는 조선의 청화백자를 빼닮았다. 유럽 백자의 뿌리는 바로 조선 청화백자였고, 왜란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기술이 원천이었다.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도 동아시아에 몰려왔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앞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하던 삼각무역에 종사했다. 일본에서 은과 도자기를 사고, 중국에 은으로 금과 비단을 사갔다. 1500~1800년 사이에 중국이 무역을 통해 수입한 은은 6만8,000톤에 이르렀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한 은의 절반에 해당한다. 유럽은 중국에서 엄청난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이 무역적자는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해소됐다.

임진왜란은 16세기말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전란 이후 3백년 동안 아시아에는 유럽 열강이 들어와 각축전을 벌였고, 그 틈에 일본이 재기했다. 새로운 국제전쟁이 벌어질 상황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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